Esquire Korea, 2014년 10월
최태형 | PHOTOGRAPHS BY PARK NAMGYU

그때로 돌아간다면…

“난 네가 원하는 것처럼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

삼 년을 만난 그녀에게 내가 던진 마지막 말이다. 수없이 했던 몹쓸 말 중에 마지막 몹쓸 말이 됐다. 그녀는 못된 망아지 같은 나 때문에 삼 년간 울고, 참고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그러곤 결국 밀려나듯 떠났다.

그녀를 밀어낸 건 나의 독하고 못된 말만은 아니었다.

사실 가만히 있던 그녀가 좋다며 들들 볶은 건 나였다. 사탕 같은 말을 입에 물고 뚝뚝 흘렸다. 우선 던지고 봤다. 그녀가 싫대도 웃었다. 웃는 얼굴엔 침 못 뱉는다고 했으니까. 뻥은 치고 봤다. 무조건 다 해준다고 말했다. 허풍에 돈 드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네가 좋다며 내게 달라며 그녀의 정신을 흩트려놨다. 정신없는 그녀를 내 맘대로 들었다 놨다 했다. 놀란 듯 동그랬던 눈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러다 그녀가 마음을 열자 꿀에 물을 탄 것처럼 냉랭해진 것도 나다. 다 잡아놓았다고 생각했는지 그랬다.

그때부터 우리의 사이는 반대가 됐다. ‘넌 연애하기는 별로인데 결혼하기엔 좋을 것 같아.’ 그녀를 앞에 두고 이런 말도 했다. 놀 때는 혼자였고 힘들고 허전할 땐 그녀를 찾았다. 해줄 건 없는데 원하는 것만 많았다. 그녀가 다가오면 앞을 막으면서도 떠나진 못하게 했다.

그녀는 요즘 사람 같지 않았다. 나를 받아주고 이해해줬다. 기다리고 챙겨줬다. 좋아한다는 말을 하진 않았지만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은 거짓말을 못했고 난 눈치가 빨랐다. 그녀가 떠난 건 욕심 때문도 아니었다.

그녀는 나와는 반대의 사람이었다. 내가 멀리 가면 따라오기보단 조용히 기다렸다. 내가 들뜨면 차분했고 화를 내면 오히려 따뜻해지는 여자였다. 내가 조급해할 땐 안정의 소중함을 일깨워줬고, 조바심에 지칠 땐 돌아가는 길에서 멋진 풍경을 보는 방법을 알려줬다. 나는 술잔에 가득 따른 맥주처럼 넘칠 듯 부글대는 거품이었는데 그녀는 차가운 싱글 몰트위스키 같았다. 요란하고 시끄러운 건 나지만 깊고 센 건 사실 그녀였다.

그래서 연애보다 결혼이라고 했던 내 말은 결혼에 방점을 찍은 진심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못된 남자가 진심을 전할 땐 말이 날카로워졌다. 멋없이 툭 던지는 게 다였다. 좋은 말로도 상처를 줬다. 나는 둥근 말도 뾰족하게 전했는데, 그녀는 뾰족한 말도 가시를 빼고 들어줬다.

그녀는 누구와도 잘 맞을 사람이었다. 사실 난 어디에 있어도 모난 사람이다. 그녀는 둥글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난 모난 돌이 에지가 있다고 했다. 그래도 우리는 제법 잘 맞았다. 다 내 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도 그렇다고 말했다. 우리가 싸울 때 화내는 건 나였고 사과하는 건 그녀였다. 그래서 항상 난 아무 잘못이 없다고 느꼈고 그녀는 미안해했다.

그때 내가 타던 차는 1000시시 경차였다. 초록색 보디에 놀란 듯 동그란 라이트를 가진 일본 차 트레비스였다. 나는 첫눈에 그 차가 갖고 싶었다. 유럽 버전을 사겠다며 일본 차를 독일까지 가서 사왔다. 몇 개월간 들들 볶아 결국 내 차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50마력을 겨우 넘는 차는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아도 정숙했다. 반응이 밋밋했다. 두툼한 핸들은 잽싸게 잡아 돌려도 굼떴다. 흥에 겨워 멋대로 차선을 바꿀 때도 고작 10kg·m의 토크로는 치고 나가지 못했다. 순둥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트레비스를 좋아했다. 튀지 않고 밋밋한 게 그녀가 원하는 삶이었다. 텅텅 빈 올림픽도로에서도 시속 80킬로미터를 유지하자고 말

난 반대였다. 남들은 빨리 달리는데 시속 80킬로미터를 유지하는 게 불안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시속 100킬로미터가 내 삶이면 어쩌나 걱정됐다. 그녀가 안정이 최선이라고 말하면 난 안주가 최악이라고 답했다. 쉬엄쉬엄 가자고 하면 빨리 가서 편히 쉬자고 말했다.

그때 내가 그녀에게 소리쳤다.

“난 네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 함께 있으면 뒤처질까 불안해.”

안정적인 회사도 못 견디게 지겨웠다. 난 나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녀는 내게 이기적이라고 말했다. 내 결정에 자기는 없다며 서운해했다. 나는 앞으로도 이기적일 거라고 답했다. 앞으로도 우린 맞지 않을 거라고 했다. 맞춰줄 생각도 맞춰주길 원하지도 않는다고 쏘아댔다. 그러곤 회사를 그만뒀다. 차도 팔았다.

연애 같지 않은 연애도 잘 참던 그녀는 지쳤다. 함께할 미래가 없어졌다고 느낀 것 같았다. 즐거움도 미래도 없는 만남은 고통이었다. 그녀는 힘없이 떠났다. 엉엉 울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우린 헤어졌다.

파란색 포르쉐 타르가에 앉았다. 하늘보다 더 파랗고 땅보다 더 묵직한 4S다. 더 비싸고 빠른 차야 많겠지만 포르쉐는 아니다. 난 포르쉐를 원했다. 포르쉐는 스포츠카의 아이콘이다. 그러나 스포츠카를 타고 싶어서 포르쉐 타기로 한 건 아니다. 포르쉐이기 때문에 스포츠카가 타고 싶은 거다. 사실은 지금 당장 포르쉐의 오너가 되고 싶은 맘은 없었다. 포르쉐에는 인생이라는 레이싱에서 성공이라는 목적에 닿았을 때 앉고 싶었다. 마치 부상이나 전리품처럼 그렇게 얻고 싶었다. 그래서 검은 머리보다 흰 머리가, 날렵함보다는 중후함이 포르쉐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 포르쉐를 살 수 있다면 아버지께 선물하고 싶다. 그러곤 내가 아버지 나이쯤 되었을 때 물려받으면 최상의 시나리오일 것 같았다.

차를 받아 혼자 사는 집으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였다. 오랜만에 셔츠를 꺼냈다. 통이 너무 좁지 않은 슬랙스 바지에 말끔히 밀어 넣었다. 가벼워 보이는 건 원치 않았다. 가벼워 보이면 아버지 차를 얻어 탄 애송이처럼 보일 것 같아서였다. 단정하고 말끔해야 조금은 포르쉐와 어울릴 것 같았다. 포르쉐는 젊은 날의 치기로 타는 스포츠카가 아니란 생각에서다. 우선 차를 몰고 본가에 갈 생각이었다. 먼저 아버지와 함께 드라이브하고 싶었다. 시동을 걸기 전까진 그랬다.

타르가 4S에 앉으며 왼손으로 키를 돌렸다. 묵직한 고양이과 동물이 잠을 깨워 날카로워지듯 으르렁대는 엔진 소리가 들렸다. 등에 달라붙은 박서 엔진이 두근대듯 쿵쾅대자 집으로 향하려던 마음이 바뀌었다. 차는 젊었다. 품격이 느껴지는 외모와 느낌은 아랑곳하지 않고 젊음이 요동쳤다. 누구라도 옆에 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감이 상승했다. 멋진 삶 같았다. 남들보다 10년, 아니 20년은 앞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 밤 누구와 함께여도 멋져 보일 것 같았고 누구라도 옆에 둘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를 몰고 이태원으로 향했다. 이태원은 불야성이었다. 파란 포르쉐에 눈길을 주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초록색 신호에 맞춰 RPM을 높였다. 빨간색 신호에는 톱을 열었다. 전화가 왔다.

“방금 오빠야?”

10살 가까이 어린 A였다. 좋은 건 어찌나 빨리 알아보는지 여우가 따로 없었다. 몇 번 그녀와 드라이브를 꿈꿨지만 언제나 바쁜 그녀였다. 연락은 닿을 때도 닿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녀 맘대로였다. 그런 그녀가 차에 올라탔다. 미소를 보니 으쓱해진 것도 같았다. 마치 자신을 데리러 온 왕자를 만난 것처럼….

“오빠 멋지다.”

처음으로 묻지도 않은 말이 나왔다. 물었어도 답하지 않았을 말이다. 시선을 돌리자 횡한 가슴골이 보였다. 미끈한 허벅지도 드러났다. 그녀는 뻔히 알면서도 옷매무새를 가다듬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러 대범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액셀러레이터를 깊게 눌러 3.8리터 수평대향 6기통 가솔린 엔진의 잠을 깨웠다. 화난 살쾡이나 치타, 호랑이의 소리가 이럴까? 아니 어쩌면 절정에 다다른 맹수의 교성 같기도 했다. 그녀의 몸이 버킷 시트에 파묻히도록 내달렸다. 오른손은 어느새 그녀의 허벅지와 가슴을 넘나들었다. 별다른 제약이 없었다.

그런데 뭔가 허전했다. 시트와 시트 사이에 위치한 스포츠 버튼을 눌렀다. 굉음을 내는 새파란 포르쉐가 아스팔트를 꽉 쥐어 짜며 뜯어내듯 내달렸다. 이상했다. 기분이 허공에 뜬 것 같았다. 4.4초 만에 시속 100킬로미터에 닿았지만 어쩐지 마음은 더 급해지는 듯 불안했다. 내가 원했던 차다. 원했던 힘과 스피드다. 어떻게든 해보고 싶었던 어린 여자도 함께다. 그런데도 기쁘지 않았다. 강변북로를 달리는 모든 차들이 한 번씩 눈길을 준대도 허무하기만 했다. 타르가의 톱을 열어 하늘을 보며 달리면서도 꽉 막힌 그냥 911 같았다. 답답했다. 타르가만의 매력인 B필러가 차를 가로지르고 커다란 통유리가 보호해주지만 헐벗은 911 컨버터블을 타는 것 같기도 했다. 헐벗은 옆자리 그녀 때문인가…. 들뜨기만 한 내 마음 때문일까…. 차를 돌려 이태원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만났던 곳에 다시 그녀를 내려주기 위해서다. 그녀는 서운해했지만 나는 아쉽지 않았다. 모든 게 완벽한데 이상하게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꿈에 그리던 차도 소용이 없었다.

그때 한동안 잊고 지냈던 지난 여자친구가 떠올랐다. 헤어진 지 반년도 넘었지만 만나고 싶었다. 채워지지 않는 게 있어서였다.

용기를 내 그녀의 집 앞에 갔다. 그녀에게 나오라는 문자를 보내고 문 앞에서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단정한 차림의 그녀가 눈앞에 있었다. 포르쉐를 보자 동그란 토끼 눈을 반짝였다.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믿을 수 없는 안정감이었다. 말없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조수석에 태웠다. 얇고 가는 손목이 마치 포르쉐의 스티어링 휠 같았다. 한 손에 감기지만 쉽게 잡아채선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옛날과 달리 그녀가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지만 오히려 안정감은 배가됐다.

그녀를 태우곤 스포츠 모드를 껐다. 일순간 거친 숨을 내쉬던 자동차는 조용해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더욱 잘 들렸다. 차를 잠시 세우고 톱을 열었다. 그녀는 여느 오픈카와 다르게 안정적이라고 말했다. 오픈카는 왠지 불안한데 이 차는 아늑하다고 했다. 그녀는 여전했다. 그때 가벼운 바람이 우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그녀를 쓰다듬은 것 같기도, 그녀가 내 머리를 어루만진 것 같기도 했다. 잘 지냈냐고 잘 견디고 있냐고 위로하는 것 같았다.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등에 붙은 박서 엔진이 아니었다. 설레었다. 그녀도 그런 것 같았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꼭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빠르게 달려 지나치는 것보다 달도, 바람도 세심하게 느껴야 하는 차 같았다. 타르가는 달리기 성능보다 감성을 자극하는 기술이 더욱 뛰어나 보였다.

그때 내가 그녀를 잡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여전히 행복했을까? 함께 더 많은 얘기를 나누었을까? 아무런 말없이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고, 저녁이면 손을 잡고 돌아와 따뜻한 밥을 먹으며 뉴스를 보고 있었을까? 별의별 상상을 다 했다. 포르쉐 타르가에 앉아 맞는 가을바람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낭만적이었다.

남산으로 차를 돌렸다. 연애하면서 자주 들른 레스토랑으로 갈 생각이었다. 너무 달거나 드라이하지 않은 레드와인을 시켜놓고 차분히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였다.

“우리가 그때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PORSCHE 911 TARGA 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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