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말하기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준다. 화려한 치장보다 담백함이 돋보인다. 멋진 남자 얘기가 아니라 사용설명서에 대한 이야기다.

Numéro
에디터 | 최태형 포토그래퍼 | 김태선

기기의 사용법을 익히기 위해서 사용설명서를 펼쳐보는 일은 보통 남자의 몫이다. 사용설명서는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고 꾸밈없이 명료하게 방향을 제시한다. 화려하기보다 담백하고 눈을 자극하기보다 머리를 자극한다. 그렇다고 위트를 빼놓는 경우는 없다. 이렇듯 사용설명서는 남자의 미덕을 고스란히 닮았다. 그래서 남자의 책이라 말할 수 있다. 아름다운 시집과 훌륭한 소설만이 감성을 자극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남자는 새로운 취미를 만났을 때, 새로운 활동을 앞두고 있을 때,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을 때 차분히 앉아 사용설명서를 편다. 처음 만나는 모든 것은 남자를 자극한다. 이때 남자의 흥분을 억누를 수 있는 것은 사용설명서뿐이다. 그들이 첫 대면을 경망스럽게 망치지 않기 위해 하는 일은 사용설명서를 정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손에 든 컴퓨터의 사용설명서는 아이를 컴퓨터 박사로 만들고, 처음 손에 든 구형 카메라의 사용설명서는 미래의 포토그래퍼를 약속한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작은 로봇의 사용설명서, 작은 장난감 비행기의 사용설명서는 남자를 우주로, 하늘로 인도한다.

남자들의 사용설명서와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버벌 진트(힙합 뮤지션)

카세트테이프 녹음기를 제외하고는 나의 첫 리코딩 장비였던 롤랜드(Roland)사의 VS-880. 고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께 졸라서 마련한 디지털 멀티트랙 리코더이다. 이 장비를 사용해서 처음으로 녹음한 것은 나름대로 당시의 스매싱 펌킨스의 스타일을 따라 만들어본 곡이었다. 드럼 소리를 어디에서 갖고 와야 하는지를 몰라서(내 방엔 컴퓨터도 없었고, 샘플 CD란 것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입으로 킥과 스네어, 하이해트 소리를 흉내 내 녹음한 후, 그것들을 ‘1분 나누기 BPM’으로 계산해서 뽑아낸 위치마다 일일이 ‘복사하기’, ‘붙여넣기’로 배치시키는 일명 ‘노가다’ 시퀀싱을 했다. 그런 다음 싸구려 전자 기타를 사용해 톤만 바꿔가면서 기타 트랙뿐만 아니라 베이스 트랙까지 ‘땜빵’하는 방식이었다. 영문 매뉴얼은 물론 ‘코스모스악기’에서 한글로 번역해놓은 매뉴얼조차 단 한 차례도 제대로 읽지 않고 장비를 만졌기 때문에 극히 일부 기능만 사용한 것 같다. 지금 다시 해보라면 지겨워서 못할 것 같은 작업 방식은 내가 처음으로 PC를 구입한 2000년까지 이어졌으며, VS-880을 이용한 마지막 결과물이 바로 버벌 진트 디스코그래피의 첫머리를 차지하는 싱글 〈Sex Drive〉다. 하지만 이젠 입으로 낸 가짜 스네어 소리를 디안젤로(D’angelo)의 〈Voodoo〉에서 따온 림샷이 대신했고, 트래커 소프트웨어가 0.01초까지 따져서 소스를 하나하나 때려 넣던 방식에서 나를 해방시켰다. 2001년 이후로는 전원도 켜본 적이 없는 이 장비의 매뉴얼을 얼마 전 이삿짐을 싸다가 발견했다. 그 당시 내가 한 번만이라도 이 사용설명서를 정독했더라면 조금은 더 편하게 작업하지 않았을까? VS-880은 어느 순간부터 행방을 알 수 없지만 그 매뉴얼을 잘 보관하고 있던 걸 보면 밀린 숙제처럼 내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듯싶다.

최태형(〈누메로 코리아〉 피처 에디터)

내 스쿠터인 베스파 PX125와 다이하쓰사의 트레비스는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분신 같은 존재다. 집과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 외의 대부분을 나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나는 스쿠터 위에서 20대 초반을 보냈고 3개월의 고생 끝에 독일에서 직접 수입한 트레비스와 20대 후반을 보내고 있다고 할 정도다. 나의 20대는 스쿠터와 함께 시작했다. 2000년 베스파를 보고 첫눈에 반해 그 당시 흔치 않았던 스쿠터에 관한 정보 사이트를 만들었고, 그 덕에 이곳저곳에 스쿠터에 대해 소개하며 글을 쓰게 됐다. 그 당시 베스파는 한국에 정식 수입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신형 베스파를 보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스쿠터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외국 사이트 곳곳에 숨어 있는 베스파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모으고 공유하던 시절이었기에…. 그리고 한참 후인 2006년 베스파가 한국에 정식 론칭하게 되었고, 드디어 한국에서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베스파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놓은 한 뻣뻣한 사용설명서까지 볼 수 있게 됐다. 이 사용설명서는 그동안 베스파의 불모지였던 한국의 라이더에게 매우 상징적인 의미다. 50년도 더 된 중고를 단지 ‘감’으로 수리하고 타고 다니던 상황에서 사용설명서는 정식 서비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참 뒤 새로운 탈것이 눈에 들어왔으니, 이 역시 한국에서는 정식으로 유통되지 않는 일본의 경차 트레비스였다. 베스파를 타던 시절의 우여곡절을 또다시 겪으려 했는지 트레비스를 직접 수입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과 운행 방향이 다른 일본이 아니라 유럽 버전으로…. 일본 딜러를 통해 독일 딜러를 소개받고 독일에서 뽑은 새 차를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배에 실어왔다. 장장 3개월간 이런저런 수입 서류며 환경 검사까지 일일이 신경 써가며 마음을 졸였다. 그렇게 커다란 트럭에 실려서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트레비스를 보았을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차를 보고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조수석 수납함을 열어 사용설명서를 살핀 것이다. 사용설명서를 보는 일은 가장 흥분되는 순간을 만끽하는 일종의 의식이다. 작은 장난감에서 자동차까지 감정을 싣지 않고 담백하게 설명할 수 있는 책. 그건 아마 사용설명서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게 또 남자의 미덕 아니겠는가?

박지원(Elephant Design Lab 기획실장)

나는 형편상 원하는 것을 모두 살 수는 없으니 100% 얼리어답터라 말할 순 없지만 항상 새로운 것을 접하는 라이프스타일상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신제품을 눈여겨본다. 즉 ‘윈도쇼핑 얼리어답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나에게도 환희의 순간이 있으니 바로 고르고 골라 구입한 제품의 포장을 뜯는 순간이다.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 역시 국내 출시일을 학수고대하는 아이폰의 포장을 뜯는 순간이다. 상자의 비닐 포장을 뜯고 사과가 그려진 보물 상자를 열면 그 안에는 반짝거리는 아이폰과 사용 방법을 다룬 사용설명서가 들어 있을 것이다. 내가 가장 환희를 느끼는 순간이 포장을 뜯는 순간이라면, 가장 집중력이 높아지는 순간은 매뉴얼 북을 정독하는 시간이다. 진정 나의 것이 된 ‘뉴 아이템’에 대한 애착 때문이라도 사용설명서를 아주 꼼꼼히 본다. 휴대폰 사용설명서 같은 장황한 설명서부터 이케아(IKEA) 가구의 심플한 그림 설명서, 6개 국어로 번역된 에스프레소 머신의 설명서까지 매뉴얼 북에는 여러 스타일이 존재한다. 사용설명서의 가치는 A/S 품질보증서만큼 중요할 때도 있고, 한번 본 후엔 다시 볼 일이 없을 때도 있기 때문에 잘 선택하여 보관 여부를 결정한다. 하는 일이 그래픽 편집 디자인 스튜디오의 기획이다 보니 디자인이 훌륭한 것들은 잘 보관해놓기도 한다.

최근에 사무실 의자를 새로 구입했는데 의자 밑바닥에 사용설명서를 끼워 넣을 수 있도록 작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용설명서를 제품과 함께 보관할 수 있는 경우는 아주 편리하다. 그렇지 않으면 제품이 고장 났을 때 설명서를 찾기 위해 방 안을 뒤지기 때문이다. 또 접으면 담뱃갑 반만 한 사이즈가 되는 이 사용설명서에는 ‘사용 시 주의 사항’에 대한 설명이 위트 있는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사용설명서를 보면 꼭 따라야 하는 규칙을 담은 조항이라기보다는 제품과 나누는 첫인사 같은 느낌이 든다. 흔하디흔한 사무용 의자일 수도 있지만 그 의자의 밑바닥에 늘 함께 있을 사용설명서 때문에 녀석의 첫인상에 기분 좋게 100점 만점을 주고 말았다. 이런 작은 재미가 바로 내가 지향하는 즐거운 라이프스타일의 첫걸음이며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는 사용설명서의 의무 아닐까?

박민준(DJ Soulscape)

파이오니아(Pioneer) djm-909는 출시된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국내에 정식으로 출시되지 않은 제품이다. 이 모델을 구하기 위해 미국에 살고 있는 친하지도 않은 친구들에게 친한 척해야 했던 ‘뻘쭘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게다가 어렵게 구한 이 제품은 120V 제품이어서 트랜스를 따로 맞춰서 들고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까지 감수해야 한다. 우리말로 ‘음질 조절기’라고 부르는 이 디제이용 믹서는 아직도 파이오니아의 2 channel(주로 힙합, 스크래치 디제이들을 위해 두 채널로 전면 패널이 심플하게 구성되어 있는 믹서의 총칭) 플래그십 모델로서 본분을 다하고 있다.

디제이용 믹서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해보자면 1960년대에 보작(bozak)사에서 처음 만들어낸 로터리 믹서를 시작으로 길지 않은 역사이지만 엄청난 발전과 혁명을 거듭한 분야가 바로 이 디제이 믹서다. 초기 라디오 디제이나 디스코텍의 디제이들을 위한 믹서의 방식이 하이엔드 오디오의 그것과 닮았다면, 1970년대 이후 더 빠르고 다이내믹한 조작이 가능한 페이더(fader) 형식의 인터페이스를 추가하면서 디제이들이 전혀 다른 스타일의 디제잉을 창조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다이렉트 턴테이블과 더불어 오늘날 힙합이라는 문화를 탄생시킨, 나아가 모든 종류의 클럽 음악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것이 바로 이 디제이 믹서다. 단순한 음질 조절기가 아니라 하나의 악기에 가까운 제어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djm-909는 최초로 터치스크린 인터페이스를 탑재한 모델로 발매 전부터 큰 관심을 모았다. 퓨처리스틱한 외관에 계기판을 닮은 전면부로 혹시 비행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지만 매뉴얼을 보니 사실무근이었다. 하지만 40종류가 넘는 이펙터와 페이더 커브를 터치스크린으로 실시간 조작 가능하다는 점은 그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숫자가 친구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공학도들에게는 매뉴얼상의 스펙(specification)을 확인하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정말 순백에 가까운 SNR(signal to noise ratio)라든지 이펙터의 조작 가능한 파라메터들을 확인하는 순간은 점수가 가장 잘 나온 성적표를 보는 순간보다 더 기쁘지 아니한가. 광고나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만 매뉴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어느 제품이 완벽히 나의 것이 되고 나면 그에 대한 권리와 책임을 100% 솔직하게 알려주는 것이기에 남자들에게는 매뉴얼이야말로 진정한 소유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