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quire Korea, 2014년 9월
글/최태형 사진/박남규
삶은 불현듯 끝난다. 삶이 한순간 불쑥 주어진 것처럼 그렇다. 준비하고 경험해본 적 없는 인생은 어느 순간 부끄러운 단면을 보이기도 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남기기도 한다. 누군가는 뒤늦게 돌아보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하며, 어려운 때를 잘 넘긴 인생은 풍요롭게 빛을 낼 때도 있다. 그러곤 때가 되면 영영 떠난다. 누군가는 그렇게 잊히고 누군가는 기억에 남는다.
사람은 모두 죽고, 우리는 언젠가 떠나야 한다. 죽음은 자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경우 불쑥 찾아온다. 그러나 모두가 죽는다는 명백한 진리 앞에서도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고 준비하기란 쉽지 않다. 피하고 싶은 일일수록 더 멀리 도망가는 게 사람이라 그렇다. 그래서 스스로 마지막을 알아차리고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경건함마저 느껴진다.
나에게도 차분히 삶을 정리할 시간이 주어지길 바란다. 부끄러운 과거는 용서를 구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을 기회 말이다. 그러곤 어느 순간 영영 잊혔으면 좋겠다. 일본의 자살 명소에는 “1분만 기다려봐. 컴퓨터 하드디스크는 지우고 왔나?”라는 문구가 있다고 한다. 실제로도 자살 방지에 효과적이라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고통보다 남겨질 것들의 고통이 더 클 수도 있다는 방증이다.
삶은 양파 껍질보다 더 촘촘하고 많은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망각이 없다면 곤란하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작은 티끌로 누군가의 일생을 판단하게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인간은 모든 순간을 다 기억하거나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면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다.
본능적 삶을 사는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본능 너머의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지금 온라인에선 잊힐 권리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온라인에서의 삶이 제2의 삶으로 자리 잡고, 온라인 속의 삶이 실제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제 온라인에서도 죽음을, 망각을 논할 때이다.
‘잊힐 권리’, 즉 온라인상의 ‘데이터 삭제’에 대한 논의가 유의미한 전환점을 맞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2010년부터 4년여를 끈 재판이 상고 끝에 판결이 나면서부터다. 온라인 거대 기업 구글의 패소였다. 그래서 더욱 이 논쟁은 뜨겁다.
내용은 이렇다. 스페인의 곤잘레스는 몇 년여에 걸쳐 해결된 소송이 구글 검색에 계속 노출되고 있다며 지워달라는 소송을 했다. 스페인 법원은 곤잘레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구글은 ‘표현의 자유’로 압축할 수 있는 이유로 유럽사법재판소에 상고했고, 얼마 전 4년여를 끈 재판 끝에 패소가 확정됐다.
‘잊힐 권리’에 대응한 논리는 요약하자면 ‘알 권리’, ‘표현의 자유’, 그리고 위키피디아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기억할 권리’다. 4월 ‘잊힐 권리’ 판결 이후 위키피디아의 외부 연결 링크 중 수십 곳이 삭제됐다. 위키피디아는 정확한 정보가 마땅한 설명이나 이유, 사법 심판 없이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정보는 사라지고 인터넷은 구멍 난 기억으로 가득할 것이라는 게 위키피디아 측의 주장이다. 판결 이후 실제로 구글은 일억 페이지가 넘는 위키피디아 링크 페이지를 제한하기로 결정했다. 판결 이후 3개월간 유럽에서만 10만 건에 육박하는 삭제 요구를 받았고 그중 반은 실제 삭제됐다.
‘잊힐 권리’와 ‘표현의 자유’ 혹은 ‘알 권리’로 대변되는 이 논쟁은 현재까지 개인의 권리를 불특정 집단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에 손을 들어줬다.
한국에서 개인의 디지털 데이터를 가장 많이 소유한 포털 사이트들은 현재까진 원론적인 대응만 하고 있다. 개인의 데이터는 직접 지워야 한다는 것, 망자일 경우 법정 대리인이 데이터를 상속받거나 대신 계정 삭제를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공개된 게시판의 리플이나 게시글은 삭제 요청할 수 없고 포털이 가지고 있는 개인 정보만 삭제된다. ‘개인 정보’를 어디까지로 볼 거냐는 판단을 주민등록번호, 주소 등으로 한정한 보수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될 시점이다. 지난 8월 초 3기 방송통신위원회가 발표한 주요 정책과제에 ‘잊힐 권리’에 대한 내용이 포함됐다. 삭제 요청 대상을 개인 정보에 국한할지, 게시글 및 댓글 등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다양한 정보까지 인정할지 등 적용 범위를 결정하는 연구를 진행할 방침이다. 언론 보도 등 ‘표현의 자유’와 연관이 있거나 국가안보・범죄수사 등 공익 관련 정보 등 보존이 필요한 정보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자칫 언론 통제의 또 다른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정보 주체인 개인의 기본권이 불특정 대중의 추상적인 이익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다. 자칫 발언 기회도 부여되지 않은 개인을 향한 대중의 폭력으로 변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론 통제로 악용되거나 개인에 대한 폭력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삭제의 대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고도화시킬 필요가 있다. 또한 사회적 합의도 필요하다. 우리가 일정 기간을 경과하면 형벌권을 소멸하는 공소시효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이룬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망자는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넌다. 망각의 여신이기도 한 레테의 강물을 마시고 이승의 기억을 모두 잊는다. 그래야 영혼이 새롭게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할 수 있다. 망각은 그래서 화해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끝내 망각한다. 사랑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화해와 사랑이다. 모든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게 아니라,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온라인에도 망각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