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quire Korea, 2013년 11월
글/최태형 사진/장현우, 이근수
순간의 실수로 100일간의 대중교통 이용 명령(?)을 받은 적이 있다. 차를 두고 출근하면서부터 아침의 습관이 바뀌었다. 우선 눈뜨자마자 커피 머신에 전원을 넣고 아메리카노를 진하게 뽑아 마시던 습관을 버렸다. 평소라면 커피 한 잔을 들이부어야 비로소 뇌가 깨어났겠지만, 아직 완전히 잠을 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출근하려면 집에서부터 역까지 걷는 시간과 대기 시간을 고려해 최소 30분은 일찍 일어나야 했다. 이 모자란 30분을 지하철에서 졸며 보충하는 거다. 그러니 아직 뇌를 깨우면 안 된다. 옷은 전날 챙겨뒀다. 평소에는 뭘 입고 출근할지 이미지 트레이닝만 했는데 이제는 미리 꺼내놓기로 했다. 잠이 다 깨지 않고 골라 입는 옷은 꼭 전날 마음먹은 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현실이 꿈과 섞이고 잠과 섞여 막상 회사에 도착해보면 우스꽝스러웠다. 로퍼에 과하게 멋 낸 양말을 신었다던가, 셔츠 주머니에 행커치프를 꼽는 식이었다.
신기하게 이 짓도 하다 보니 몸에 익었다. 출근길이라는 게 일 년 365일 똑같다. 같은 시간 같은 지하철 출구를 이용해 같은 칸에서 다른 열차로 갈아타는 일의 반복이다. 어떤 날은 지하철까지 어떻게 갔나 까마득할 정도로 잠결로 출근했고 어떤 날은 회사에서도 내내 잔 거 같았다(이건 아닌가?).
전날 준비한 옷을 후다닥 입고 잠이 깨기 전에 서둘러 같은 칸에 앉았다. 몸을 좌우로 밀착하고 팔짱을 껴 잘 준비도 완료했다. 습관적으로 맞은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최면에 걸리듯 시선이 발까지 떨어지면 ‘레드 선!’ 스르륵 잠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날도 같았다. 머리에서 얼굴로 얼굴에서 다리로 그리고 발로…. 그러다가 화들짝 놀랐다. 잠을 깬 건지 꿈을 꾸는 건지 헷갈렸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 삼 일째 같은 남자다. 아니 같은 머리, 같은 셔츠, 같은 양말에 구두까지 같다. 무서웠다. 내가 지금 출근을 하는 건가? 꿈에서 출근 중인가? 학교에 가는 꿈을 꾸다 지각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이 공포감을 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이 순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것을. 자칫하면 <인셉션>의 림보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날 오랜만에 출근길에 뇌를 깨웠다. 다행히 그 남자 빼고 모두 새로운 사람들이었다.
거꾸로 시작했다. 다리부터 머리로 시선을 올렸다. 구두코는 찌그러지고 뒤꿈치는 구겨져 있었다. 신발을 보지 않고 발을 밀어 넣은 흔적이다. 양말은 복사뼈까지 흘러내렸다가 끌어올리기를 반복했던지 여러 주름으로 때가 져 있었다. 그냥 신고 잤던 게 분명하다. 허벅지에 떨어졌던 음식을 대충 털어낸 자국, 더러운 손을 닦아 얼룩진 주머니 라인….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안 봐도 꼬질꼬질한 손가락을 지나 얼굴을 보니 뻘겋게 충혈된 눈이 재빠르게 무언가를 쫓고 있었다. 손에 들린 게임기다. 입 밖으로 내진 않지만 얼굴에서 뚜렷하게 읽히는 환호와 탄식, 지하철 움직임과는 반대로 몸을 이리저리 기울이며 무엇인가를 ‘움찔’ 피하는 모습이었다. 집중하는 남자가 아름답지 않은 흔치 않은 경우다. 이 남자 매력 없다.
나는 게임을 하지 않는다. 대외적으론 그렇다. 아니, 축구 게임 <위닝 일레븐>만은 예외다. 스포츠를 워낙 좋아해서다. 한사코 게임하는 남자라는 타이틀은 거부한다. 냉정히 돌아보면 아니다. 막 시작 휘슬이 울린 <위닝 일레븐> 때문에 ‘썸녀’의 전화를 건성으로 받았던 적이 있고, 혼자서 모니터를 보고 탄성을 내질렀던 적도 있다. 레이싱 게임을 하다 가는 몸을 핸들 방향으로 좌로 우로 움직였던 적도 있다. 나는 아니라고 우겨도 지하철의 저 남자와 별반 다른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집중하는 남자가 매력 없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집중하는데도 섹시하지 않은 남자가 있다. 어쩔 도리가 없는 남자. 게임하는 남자다.
[박스] 섹스도 마다하고 게임기를 켜게 한 두 개의 타이틀
위닝 일레븐 2014
<위닝 일레븐> 때문에 콘솔 게임기를 산 사람은 있어도 콘솔을 사고 <위닝 일레븐>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은 없다. 가장 파워풀한 킬링 타이틀이다. 드디어 2014 버전이 나왔다. 매년 해가 바뀔 때마다 제일 먼저 기다리게 되는 손님이다. 게임을 싫어하는 사람도 <위닝 일레븐>만은 사랑한다. 그러니까 우리 남자끼리는 <위닝 일레븐>을 스포츠로 보기로 약속한 거다. konami-korea.kr
GTA5
한마디로 게임의 목적은 도둑이 되는 것이다. 게임 안에서 상당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길가다 시비가 붙으면 액션 게임으로 변하고, 미션을 수행할 땐 아케이드 게임이 된다. 평상시에는 롤플레잉 게임이다가 차를 빼앗아 타면 레이싱 게임이 되는 식이다. 할리우드를 모델로 한 가상의 도시 산안드레스를 배경으로 독하고 못된 놈을 가상으로 맛볼 수 있는 게임이다. 위험하고 위태롭지만 재미있다. rockstarga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