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quire Korea, 2016년 1월
에디터_최태형 포토그래퍼_이혜련

예고 1학년 때 선생님께서 제게 전공을 바꾸라고 하셨어요. 원래는 예고에서 성악을 전공했거든요. 노래는 아닌 것 같다고요. 그래서 예고를 그만뒀어요. 그냥 공부하겠다고 인문계 고등학교로 전학을 갔죠. 어렵게 들어간 예고에서 그런 소리를 들은 거죠. 그런데 전 별로 충격적이지는 않았어요. 저도 제가 성악은 정말 못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오히려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해주시니까 결단하는 게 쉬웠죠. 괜히 안 되는 걸 붙잡고 있다 시간 낭비만 할 수 있잖아요. 그렇다고 제가 음악에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에요. 성악이라는 발성이 안 맞은 거죠. 고등학교에서도 음악적 재능이 많으니 작곡을 해보라고 하셨던 거예요. 그런데 전 작곡은 싫더라고요.

인문계 고등학교로 전학 후 고3 때는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쇼맨십이 있었나 봐요. 진학 담당 선생님께서 학교 선생님을 하면 잘할 것 같다고 하셨거든요. 선생님이라는 게 학생들 앞에서 일종의 쇼맨십을 발휘하는 거잖아요. 전 싫더라고요. 선생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발휘해야 할 쇼맨십인 걸 알았나 봐요.

한번 넣어서 붙으면 무조건 가야 하는 대학 특차 전형이었어요. 연기를 하겠다고 한양대학교에 원서를 넣었죠. 그때까지 연기를 해본 적은 없었어요. 한양대학교는 실기를 별로 안 봤거든요. 그냥 수능 점수만 가지고 갈 수 있었던 곳이라….

그때까지 연극을 본 적도 없어요. 그래서 연극을 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그저 연기를 해보고 싶었죠. 연기를 해야겠다고 말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내가 스스로 예쁘다고 느끼거나 남다른 자존감이 있어서 그럴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남들 앞에 서는 직업이니까요. 하지만 전 그렇지 않았어요. 그냥 정말 막연한 생각이었어요. TV 드라마를 보면 슬픈 장면에서 배우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울잖아요. 그런 장면을 보면서 그냥 저도 저렇게 울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해봐야겠다 싶었어요.

알아요. 제가 눈물 흘리는 것과 별로 안 어울려 보인다는 거요. 최근에는 밝게 웃는 역할이 더 많아서 그런 걸 거예요. 로맨틱 코미디 같은 거요. 최근 〈카포네 트릴로지〉 〈유도소년〉에서는 더 우는 역할과는 안 어울렸죠.

대학교 땐 뮤지컬이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미국으로 유학을 갔어요. 한양대에서는 뮤지컬을 안 가르쳤거든요. 저, 노래를 못하진 않아요. 맞아요. 보통 배우들이 뮤지컬을 하고 싶다고 꼭 학위를 받거나 유학을 가서 배워 오진 않아요. 그래도 가보고 싶었어요. 영국 여행 중에 뮤지컬을 보고 너무 해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영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하다가 커리큘럼이 1년 더 짧은 미국으로 갔어요. 교수님도 그랬어요. 그게 뭐라고 3년이나 배우냐고. 2년 짜리 하라고요. 하하.

그러다 결국 미국에서 7년을 있었죠. 가니까 오기 싫더라고요. 미국에서도 작은 공연을 했어요. 오디션을 거쳐 작은 무대에 오르는 경험을 했죠. 뭐 성공적이진 않았어요. 운도 안 따랐고요. 교수님이 돌아오라고 하시기도 했고, 저도 한국에서 도전하고 싶었죠. 제가 교수님 사랑을 좀 받았어요. 아는 게 없으니 도화지처럼 시키는 연기를 잘 해냈었거든요.

한국으로 돌아왔을 땐 제가 유학까지 다녀왔으니 주변에선 대극장 뮤지컬에 설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오디션을 많이 본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없는 제게 주어지는 역은 없었어요. 뮤지컬에서 노래하는 게 꿈이었던 건 아니었어요. 연기를 하고 싶었던 거죠. 뮤지컬 스타가 아닌 노래하며 연기하는 거. 그래서 연극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고 작은 뮤지컬도 하고 있죠.

한국에선 연기와 강의를 함께 해요. 돌아와서 교수님의 제안을 받고 한양대에서 강의하기도 하고 다른 학교에서 10년 가까이 연기를 가르치고 있어요. 사실 전 가르치는 것보다 일선에 있는 게 좋아요. 무대에서 연기하는 거요.

아마도 이제 제가 큰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가능할 거 같아요. 연극 무대는 영화나 TV와는 다르게 경력직이 미모보다 우대받는 시스템이거든요. 제가 서른 넘어서 열일곱 살 연기를 하는 〈유도소년〉만 봐도 그래요. 다행인 건 연극 무대는 나이에 대한 한계가 별로 없어요.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다양한 배역을 맡을 수 있죠. 연기력이 없다면 무대 위에서 나이를 먹을 수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나이 먹은 배우는 이미 연기력을 인정받은 거죠.

지금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라미란 선배도 그렇고, 영화나 TV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은 모두 연극 무대 출신이잖아요. 나이를 먹어가는 여배우라고 해서 조바심 같은 건 없어요. 늙어가면서 더 인정받으니까요.

물론 가끔 ‘왜 저 역할에 내가 섭외되지 않지?’ 하는 생각은 있죠. 연극배우들은 초연을 좋아하거든요. 어떤 연극을 처음 시작할 때 그 역할을 가장 처음 맡는 거요. 그럼 제가 그 역할의 정석이 되는 거예요. 인물을 제가 만드는 거죠. 저에겐 초연을 누가 하느냐가 더 중요한 요소예요.

〈유도소년〉이나 〈카포네 트릴로지〉 모두 제가 초연이에요. 그 역할을 다른 배우가 연기하게 되더라도 제가 바이블인 거죠. 절 보고 배역을 연구할 테니까요.

연극 〈유도소년〉이 잘돼서 곧 영화로 만들어져요. 제가 초연을 한 17세 여고생 역은 영화에서는 제가 맡으면 안 되죠. 그건 아마도 수지나 설현…. 농담으로 얘기하긴 해요. 그래도 저한테 슈퍼 아줌마 정도 역할은 줘야 한다고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마지막 공연이 가장 완벽한 것 같아요. 한 배역을 연기할 때 처음부터 캐릭터를 다 만들 수 없어요. 같은 연기를 거듭하면서 그 배역이 점점 제가 되는 거죠. 그래서 전 마지막 공연이 가장 완벽해요.

그게 연극이 가지는 생동감이죠. 편집이 아닌 실시간으로 완성되어가는 거니까요. 그래서 연극에서는 배우가 매우 중요해요. 한번 반짝 연기해놓는 게 아니고 매번 새롭게 인물을 창조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지금은 연극 〈올모스트 메인〉을 준비 중이에요. 〈러브 액추얼리〉처럼 옴니버스 연극이에요. 이건 연기를 하는 사람이 더 즐거운 연극이에요. 연기 맛이 있거든요. 그래서 배우들도 많이 보러 와요. 이 공연이 초연은 아니에요. 물론 그 초연을 연기한 배우도 저였답니다.

연극 무대에서는 인정받았다고 생각해요. 데뷔한 이후로 섭외가 끊긴 적도 없고요. 그렇지만 제가 연극배우로 규정되는 건 싫어요. 그래서 연극배우다 할 때쯤이면 뮤지컬을 하고, 뮤지컬 배우다 할 것 같으면 연극을 하죠. 앞으로는 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연기하고 싶어요.

얼마 전 배두나 씨가 연기하는 미국 드라마 〈센스8〉에 조연으로 출연했어요. 미국에서 방영되는 미국 드라마니까 모두가 영어로 연기했죠. 제가 미국에서 7년을 있었잖아요. 또 다른 연기의 맛을 느꼈어요. 또 제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처음 연기할 때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낀 것처럼요. 영어로 연기할 수 있겠더라고요. 미국으로 진출하는 것도 목표 중 하나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