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quire Korea, 2016년 1월
에디터_최태형 / 글_심정희 (패션 저널리스트)

소위 말하는 트렌드는 이제 힘을 잃었다.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이 패션계를 이끌던 시대도 지났다. 바야흐로 패션의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시대, 2016년이 그 시작점이 될 것이다.

“2016년, 패션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트렌드를 전망해주세요”라는 원고 청탁을 받고 이렇게 책상에 앉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책상에 한번 앉을라치면 다른 중요한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는 주의산만형 인간으로 수십 년을 살아온 데다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그런 성향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지만, 무엇보다 뭘 써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패션 트렌드를 전망하라고? 패션이 뭐지? 트렌드라는 게 요즘 세상에 있나? 무엇보다 사람들이 그걸 궁금해할까?

지금까지 생긴 일

좋은 시절이 있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상황이 괜찮았던 것 같다. 1월과 7월, 파리나 밀라노에서 열리는 컬렉션(패션 위크)에 가면 멋진 옷이 너무 많아서 함성이 절로 나왔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예닐곱 개의 쇼를 보고, 서너 개의 프레젠테이션에 참석하는 강행군이었지만 옷이 멋있으니 신이 났다. 매일 일기를 쓰고 싶을 정도였다니까. 나와 동료 패션 기자들은 ‘엑소’가 멋있네, ‘방탄’이 짱이네 싸우는 열성 팬들처럼 각자 좋아하는 디자이너를 칭송하다 싸움 직전까지 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 “에디 슬리먼 이번 쇼 봤지? 테일러링 죽이지 않냐?” “드리스 반 노튼에 비하면 에디 슬리먼은 애지.” “카리스마나 비즈니스 감각으로는 톰 포드가 최고야. 이건 뭐, 동물적 감각 아니냐?”

몇몇 스타 디자이너가 트렌드를 이끌던 시절로, 그들은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세상이 바뀌었다. 런웨이 위의 옷에 집중되던 관심이 조금씩 프런트 로에 앉은 셀럽으로 이동하더니 마침내는 쇼장을 찾은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옮겨갔다. 패션쇼장 안을 찍는 카메라보다 패션쇼 밖을 찍는 카메라의 수가 더 많아지는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수십 년간 패션쇼를 취재해온 전문 에디터보다 앵무새처럼 화려하게 차려입은 10대 블로거가 패션쇼장에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일도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SNS가 생기고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급격히 대중화되고 개인화됨으로써 기존의 권위가 무너지고 대중이 권력이 되는 사회 전반의 현상이 패션계에서는 그런 형태로 나타났지만 언제나 변화의 중심에 있을 땐 ‘어?’ 하다가 ‘아!’ 하게 되는 법. 그 변화가 너무나 갑작스럽고 빠른 나머지 정작 당시엔 이런 변화가 왜 일어나는지를 그 누구도 명확히 알지 못했다.

동시다발적으로 비슷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SPA 브랜드의 등장으로 모두가 싼값에 트렌드를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소수만이 특권처럼 누리던 고가 브랜드보다 거리의 아이들이나 입는 것으로 여겨지던 슈프림, 반스 같은 스트리트 브랜드가 트렌드의 중심이 됐다. 특정 브랜드나 디자이너가 아닌 대중이 트렌드를 이끌게 되면서 누구나 접근 가능하고 디자인은 친숙한 특정 아이템(아디다스 슈퍼스타 같은)이 빅 히트를 하며 ‘아이템=트렌드’가 되는 새로운 현상도 일어났다.

패션 디자이너들의 뼈아픈 실수

이런 변화의 상황에 디자이너나 유명 패션 레이블들도 적잖이 놀란 것 같다. 왜 아니겠나. 자신에게 쏠리던 시선이 일순간에 다른 곳을 향하고, 내놓는 옷에 대한 반응은 예전만 못하고, 끝없이 새로운 것을 내놓아야 하는 강박은 늘 목을 옥죄는 한편으로 굳이 새로운 걸 내놔봤자 예전만 한 박수를 받을 수 없을 거라는 건 직감으로 알겠고…. 그리하여 디자이너들은 지금 방황하고 있다. 세계 유수의 패션 하우스를 이끄는 수장이 됐든, 한때 세상을 호령하는 명성을 누리던 유명 디자이너든 ‘레트로’라는 모호한 콘셉트를 핑계 삼아 구제 가게에서 몇 달러면 살 수 있을 것 같은 옷에 브랜드의 아카이브에서 가져왔다며 얄팍한 자수나 패치워크를 더해 내놓거나, ‘저걸 누가 사 입을까?’ 싶게 요란하기만 한 옷을 내놓기 일쑤다. ‘사람들이 스트리트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이제 가장 쿨한 곳이 스트리트라고? 그렇다면 내가 정수를 보여주지’라고 작정이라도 한 듯 저렴해 보이는 옷을 쏟아낸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귀엽고 캐주얼하고 저렴한 느낌이 팍팍 풍기는 블루종을 몇백만원씩 주고 사 입을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나? BAPE 같은 스트리트 브랜드에서는 비슷한 걸 10분의 1 가격에 살 수 있는데! 게다가 요즘은 고가의 패션 하우스 제품을 입는 것보다 BAPE를 입는 게 훨씬 더 쿨하게 느껴지는데!

자, 상황이 이런데 런웨이 사진을 죽 늘어놓고 트렌드를 운운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리하여 정리하자면,

●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패션의 시대는 갔다. 고속 성장 시대, 끝없이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고, 누구든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시대에 사람들은 패션에 관심을 갖는다(“옷차림도 전략입니다”라는 유명 카피를 생각해보라). 그러나 그런 시대는 이미 끝난 지 오래고 이제 사람들은 외양을 꾸미는 것보다 스스로 즐길 수 있는 ‘경험’에 돈을 쓰고자 한다.

● 런웨이가 트렌드를 좌우하는 시대도 갔다. 유수의 패션 하우스들과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은 하루빨리 ‘스트리트’와 ‘키치’의 수렁에서 빠져나와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재정비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 시즌마다 바뀌는 트렌드 또한 이제 의미가 퇴색해버렸다. 그럼에도 계속 똑같은 옷만 입을 수는 없기 때문에 컬래버레이션이 한때 각광받았다. 이제 컬래버레이션이나 리미티드 에디션도 식상한 지점, 당분간은 새로움을 충족시키는 역할을 ‘과학’과 ‘기술’이 담당할 전망이다. ‘태양광선에서 흡수한 열과 인체의 온기를 결합해 최상의 온도로 몸을 보호해주는’ 다운재킷은 별반 차이를 느낄 수 없는 컬래버레이션 제품이나, 지난 시즌에 산 것과 디자인이나 컬러만 다른 다운재킷보다는 확실히 사람을 혹하게 만든다. 설사 그 기술력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고 해도 말이다.

● 브랜드는 확연히 둘로 나뉠 것이다. 최고급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비싼 값에 좋은 물건을 파는 브랜드, 싸지만 쿨한 이미지로 좋은 물건을 파는 브랜드. 에르메스, 로로 피아나 같은 브랜드가 전자, 유니클로, 무인양품 같은 브랜드가 후자다. 그 사이에 있는 브랜드는 점점 더 설 자리가 좁아질 텐데 그 안에서 자신만의 살길을 찾아야 한다. 가성비가 됐든 이미지가 됐든 소비자가 그 브랜드 제품을 사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살아남을 길이 없다.

우리, 소비자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 ‘패션의 시대가 갔다’는 건 패션 산업이 활황을 누리던 시대가 갔다는 의미이지 옷 입기가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SNS 시대이며, 개인의 플랫폼을 활용해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는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스타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아니, 예전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고 앞으로는 더 중요해질 것이다.

● 브랜드보다 중요한 건 취향이다. 유니클로 맨투맨을 입더라도 남들과 다르게 연출할 줄 아는 게 중요하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정하고 일관되게 밀고 나가야 멋있어 보인다. 누구나 다 아는 브랜드보다 신생 브랜드나 인디 레이블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쿨한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이다.

● 단골 가게를 만들어라. 테일러 숍과 멀티숍 등 실력과 취향을 믿을 수 있는 숍을 찾아내 그곳 스태프들과 친분을 쌓으라. 같은 값으로도 좀 더 나한테 잘 맞는 슈트를 입을 수 있고, 새로운 브랜드나 신제품에 대한 정보를 남들보다 먼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과의 교류는 패션에 대한 지식과 심미안을 갖게 해준다.

● 가게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패션 숍들이 더 많은 볼거리와 혜택을 제공할 것이다. ‘쇼루밍족’이라는 단어가 처음 생겨났을 때, 그 단어 속에는 어느 정도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앞으로 브랜드들은 O2O(Online to Offline) 방안의 하나로 오프라인 매장을 쇼룸처럼 활용하고, 손님들에게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매장 유입 고객 수를 늘리려고 할 것이다. DIY 숍처럼 고객이 매장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제품 완성 과정에 참여하게 하는 매장도 늘어날 것이다. 그런 매장 중에서 내 취향에 맞는 곳을 찾아 즐기고 경험하고, 맘에 들면 구매하면 그만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패션과 스타일의 정의를 더 넓혀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다. 우리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만이 패션일까? 어떤 옷을 선택하고 어떻게 입느냐가 스타일일까? 둘 다 대답은 ‘아니다’인 것 같다. 한 사람의 패션을 논하려면 어떤 옷을 걸쳤나로 끝날 게 아니라 주말 오후에 캠핑을 가느냐, 요리를 하느냐, TV를 보다 잠드냐 등 총체적으로 봐야 할 것이고, 그 사람이 애플 워치를 찼는지, 패션 시계를 찼는지, 아니면 롤렉스를 찼는지를 봐야 그의 아이덴티티를 논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기존의 바운더리를 넘어 쓰타야와 샤오미와 스타워즈가 패션의 극히 중요한 일부가 되는 시대, 그게 우리의 2016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