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quire Korea, 2014년 9월
글/최태형 사진/박남규
집에서 TV를 본 게 언제였더라? 물론 집에 TV가 없어서는 아니다. 오히려 최근 독립하며 한 가계 지출 중 가장 비싼 게 TV였다. 32인치 TV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50인치 TV 한 대를 더 들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TV 산 걸 자랑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내가 TV를 볼 마음을 가진 시청 ‘예정자’라는 얘기가 하고 싶어서다. 매달 미디어 관련 기사를 쓰고 있기에 어떻게든 TV와 친해질 심산에서였다.
한동안 습관적으로 나의 일과는 TV와 함께했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TV를 켰고 외출해서 돌아와도 마찬가지였다.
오전 방송은 뉴스 프로그램으로 시작했다. 지난밤 사이 뉴스를 정리해주거나 아예 신문을 펼쳐 놓고 읽어주기도 했다. 꽤 좋았다. 그중에서도 SBS의 〈모닝와이드〉는 생방송 뉴스 쇼라는 콘셉트로 뉴스도 조금, 흥밋거리도 조금씩 섞어줬다. 그러나 뉴스는 오전을 장악하지 못했다. KBS 〈아침마당〉을 선두로 MBC 〈모두 다 김치〉, SBS 〈청담동 스캔들〉이 노골적으로 아줌마를 겨냥했다. 그날의 〈아침마당〉의 주제는 ‘유자식이 상팔자? 무자식이 상팔자?’였는데 채널을 돌리지 않곤 힘들었다. 차라리 힘들었을 시절을 얘기하며 진행자 이금희가 눈물을 보이는 게 더 봐 줄만 하다고 느꼈다. 아줌마들의 ‘감 놔라 배 놔라’를 피해 채널을 돌린 아침 드라마는 더 가관이었다. 김치로 따귀를 때릴 정도로 자극적인 막장이거나, 상류사회의 스캔들을 다루겠다며 노골적 뒷담화거나…. 남자가 볼 프로는 아니었다.
퇴근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썸녀’를 집에 끌고 와서도 TV를 켰다. 럼에 애플 민트를 넣고 라임즙을 짜 모히토를 만들어주고도 TV만 봤다. 분위기 있는 음악을 틀어달란 요청도, 자기 얘기에 집중해달란 투정도 무시하고 몰입을 시도했을 정도다. 8시부터 시작된 뉴스는 10시까지 볼만했다. 보수적인 지상파 뉴스가 끝나면 진보적인 종편, 다시 극보수적인 또 다른 종편을 오갔다. 썸녀도 뉴스를 보는 건 뭐라 하지 않았다. 비록 정치 색이 달라 정치 얘기는 하지 말자고 선을 그어야 했지만, 여자를 다 이해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괜찮다.
드라마를 틀었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와 〈괜찮아 사랑이야〉을 번갈아 가며 채널을 맞췄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의 장혁은 또 재벌이다. 장나라는 대한민국 대표 평범녀다. 학벌, 빽, 자신감도 없는 그저 그런 여자. 안 봐도 신데렐라 스토리다. 결국 여자들의 로망을 위해 전개된다. 〈괜찮아 사랑이야〉는 조인성이 나오는 것부터 에러다. 그냥 여자만 보라고 해라. 조인성은 공효진한테 눙치고 시비 걸고 매너 없게 굴지만 실은 따듯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잘생긴 것도 보기 싫은데 속이 뒤집어졌다. 공효진뿐 아니라 내가 만든 모히토를 마시던 여자마저 눈이 하트가 되는데 TV를 꺼버렸다. 생각해보니 TV를 가장 오래 켜놓은 시간은 침대에서였다. 모히토에 취한 그녀와 함께 누운 침대에 간접조명이 필요했을 때다.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고 화면전환이 느린 채널을 찾기 위해 그마저도 여러 번 채널을 돌렸다. 그러다 결국 TV에서 볼만한 프로그램을 찾는 데 실패했다.
TV에는 남자가 볼 방송이 없다. 남자들을 위한다는 XTM마저 남자가 뭘 좋아하는지 모른다. 스타일리스트가 나와 이렇게 입어라 저렇게 입어라 하는 걸 좋다고 보고 있을 남자가 몇이나 될까? 여자친구가 그렇게 한다 해도 TV 채널 돌리듯 입을 비틀었을 텐데….
남자가 볼만한 TV 프로그램이 없다고 투덜댔다. 지상파와 종편을 오가며 스타 PD 호칭이 붙은 PD도, 종편에서 막장 예능을 만드는 PD를 만나기도 했다. 주말 예능을 책임지는 PD도 만났다. 대체 왜 막장 아니면 사랑놀음, 아니면 유치해서 눈을 뜰 수 없냐고 투덜댔다. 그러나 똑같은 벽에 부딪힌다. 사실 방송의 문제를 지적하면 거의 대부분 몇 가지 논리를 뛰어넘지 못하고 매몰된다. 바로 시청대상과 시청률이다. 그럼 더 이상의 투정이 무의미하다.
TV의 주 시청자층은 여자다. 지상파는 초등학생도 이해하는 방송을 목표로 한다. 종편은 무플보다 악플이 목표다. 종합하면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로 유치하거나 막장으로 흐른다는 말이다. 적극적인 채널 선택권을 가진 것도 여자고 상대적으로 감정적 공유를 잘하는 여자가 드라마나 남들의 얘기에 감정을 이입할 가능성도 높다. 쉽게 반응하고 몰입하는 대상이 여자이니 여자를 위할 수밖에…. 시청률을 논하기 시작하면 팔리지 않는 방송을 만들어 달라는 건 순진한 요구다.
그러나 대박 프로그램을 원한다면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시청률 47퍼센트로 역대 드라마 최고 시청률을 자랑한 〈주몽〉만 봐도 그렇다. 남자 시청자가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초대박이 날 수 있다. ‘귀가시계’라 불리던 〈모래시계〉도 태수와 우석의 우정과 결투가 남자들을 움직였다. 두 드라마 모두 막장이 아니라 역작이었다. 수년이 흐른 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다. 남자들은 잘 짜인 방송에 반응한다. 잘 짜인 연출과 스토리가 필요하다. 하다못해 고증이라도 철저하길 원한다. 물론 그러다 쪽박을 찰 수 있다는 건 안다. 그래도 출생의 비밀로 모든 걸 덮어버리는 드라마만 계속 볼 수 없어서 하는 말이다. 남자들도 볼만한 TV 프로그램이 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렇다. 비싸게 산 50인치 TV가 아까워서 하는 말이다.
[박스] 남자도 TV 볼 줄 안다.
남자들이 TV 시청률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외면하지 마라. 이렇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도통 죽었던 사람이 점 하나 찍고 나타나는 것을 모른 척할 수 없는 게 남자들 탓은 아니지 않나. 남자들도 눈에 불을 켜고 사수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셜록〉
〈셜록〉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현대판 〈맥가이버〉이다. 문제 해결의 합이 딱딱 맞아떨어진다. 〈맥가이버〉는 종종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 너무 친절하게 과학 지식을 설명했던 게 아쉽다면 〈셜록〉의 전개는 빠르기까지 하다. 비록 〈셜록〉에서 셜록 홈스가 죽었다가 살아나긴 했지만 〈아내의 유혹〉에서처럼 점 하나 찍고 나타난 게 아니다. 어떻게 죽음을 가장했는지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납득을 넘어 감탄할만했다.
〈명량〉
물론 영화를 예로 드는 건 조금 반칙인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TV 앞으로 여자를 불러 모으면 대박이 될 수 있지만 초대박이 되려면 남자까지 모아야 하니 말하겠다. 철저한 고증을 염두에 두어야 남자가 움직인다. 세세한 갑옷 묘사, 실제 같은 배의 디테일 등이 남자를 몰입시키는 요소다. 〈조선 총잡이〉처럼 엉터리 고증을 한다면 남자는 거기서 딱 흥미를 잃는다. 조선 시대에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심지가 다 타야 총이 발사되는 화승총을 쓰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