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quire Korea, 2016년 2월
에디터_최태형

기계식 시계를 만드는 장인들은 언제나 자신만의 확고한 정체성을 중요시한다. 기술은 흉내 낸다 해도 오랜 역사와 전통 위에 만들어진 정체성은 넘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은 시계 제조사들의 신제품이 새롭게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명품으로 인정받는 시계일수록 더욱 그렇다. 때론 절대 바뀌지 않는 요소들이 심심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브랜드의 정체성이 바뀔 정도로 많은 변화가 있다면 그 역시 서운할 게 분명하다. 그래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일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예상을 뛰어넘어 가슴 설레게 하는 시계, 예상을 벗어나 한참을 바라보게 하는 시계들을 찾아봤다. 시계에 정답은 없다. 반전에 가슴이 뛰는지 아닌지는 각자가 판단해보자.

파텍필립의 칼라트라바 파일럿 트래블 타임

파텍필립의 칼라트라바 파일럿 트래블 타임은 모델명에도 명시한 것처럼 파일럿 시계다. 굳이 이름을 보지 않아도 한눈에 하늘을 향한 남자들의 로망을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아라비아숫자로 쓰인 큼직한 인덱스의 두 가지 시간대를 표시할 수 있는 GMT 기능 역시 흠잡을 곳이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파텍필립이 보여준 시계들을 돌아보면 파일럿 시계를 선보일 거라 예상하긴 힘들었다. 파텍필립 하면 먼저 대를 이어 물려주는 최고급 시계, 우아한 드레스 시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초기의 칼라트라바 모델들을 보면 군더더기 없는 단순한 디자인과 보수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튀지 않는 사이즈가 여전히 인상적이다. 또한 파텍필립 최초의 스포츠 워치인 노틸러스만 보더라도 스포티한 느낌에 앞서 단아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작년 바젤월드에서 선보인 칼라트라바 파일럿 트래블 타임은 조금 다른 느낌이다. 파일럿 시계를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풀어냈고 사랑받을 걸 알지만 어쩐지 서운한 것도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완벽하게 파일럿 시계에 대한 기대를 만족시켜서 그렇다. 파텍필립보다 파일럿 시계가 먼저 보이는 것 같아서….

벨앤로스의 빈티지 컬렉션

벨앤로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정사각형의 독특하다 못해 대범한 케이스 디자인이다. 마치 비행기 조종석에 붙은 시계를 그대로 떼어 온 것 같은 디자인. 벨앤로스가 전통적인 파일럿 시계 제조사인 IWC나 브라이틀링에 비해 한참 후발 주자임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다. 2002년에 첫 매뉴팩처를 만들고 2005년에 BR01을 선보인 것을 생각하면 이 사각 프레임이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케이스가 동그란 벨앤로스의 빈티지 컬렉션은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벨앤로스 특유의 폰트로 쓰인 가독성 높은 인덱스와 다이얼 위 스몰 핸즈를 보고도 그렇다.

에르메스와 애플워치

에르메스와 애플워치의 컬래버레이션은 어느 브랜드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럭셔리 브랜드의 대명사인 에르메스와 전자 제품의 명품으로 불리는 애플. 에르메스의 장인 정신과 품격을 앞에 놓자면 과연 스마트워치와 손을 잡았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애플워치는 가격이나 무브먼트 면에선 백만원 안팎의 쿼츠 제품과 경쟁하기 때문이다. 물론 에르메스가 시곗줄을 공급하는 브랜드가 없는 건 아니다. 파르미지아니 역시 에르메스의 시곗줄을 사용한다. 그러나 기계식 시계 중에서도 정체성이 확고한 파르미지아니와 애플워치는 그 공략 대상이 다르다. 애플 마니아 입장에서 보면 또 다르다. 애플이 만들면 달랐으니까. 스마트워치를 만들면서도 장인 정신이라 불릴 만한 특유의 밀도 높은 마감을 보여줬다. 또한 기계식 시계에 버금가는 감성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에르메스와의 협업은 정체성을 뚜렷하게 하고 완성도를 높이려는 시도다. 두 번 세 번 다시 봐도 갖고 싶으니까.

MB&F

예거 르쿨트르와 해리 윈스턴을 거치며 창의적인 결과물로 주목받던 막시밀리앙 뷰세. 그가 돌연 친구들을 불러 자신만의 결과물을 선보인 게 10년이 넘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10년 전보다 훨씬 많은 마니아들의 주목을 받게 됐다. 그의 시계는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결과물이 상상 속이나 어릴 적 꿈꾸던 미지의 세계를 담고 있어서이다. MB&F의 시계는 살아 움직이는 로봇, 우주 행성을 날아다니는 우주선 같다. 거미를 쏙 빼닮거나 부엉이를 가져다 놓은 듯한 시계는 그의 상상이 어디까지 펼쳐질지 궁금하게 만든다. 그의 시계는 섣불리 예상할 수 없다.

[박스] 프레드릭 콘스탄트의 클래식 매뉴팩처 문페이즈

프레드릭 콘스탄트의 브랜드 철학은 ‘누구에게나 명품 시계의 아름다움을 누릴 권리가 있다’이다. 그래서일까? 가끔 그들의 시계를 보면 어디서 본 것 같은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클래식 매뉴팩처 문페이즈는 어쩐지 자꾸 파텍필립을 떠올리게 한다. 1950년대에 선보여 소더비 경매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던 파텍필립 레퍼런스 2497 말이다. 아마도 기분 때문이겠지? 물론 똑같다는 건 아니다. 또한 비슷한 파일럿 시계나 다이버 시계처럼 같은 제품군으로 분류되는 시계들은 공통된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시계 분류의 공식을 잘 따른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어느 브랜드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완성도다. 판단은 각자 할 것.

에이치 모저 앤 씨의 알프워치

이 시계는 스마트워치가 아니다. 자칫 애플워치와 헷갈릴 수 있지만 스마트워치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은 기계식 시계다. 스위스의 기계식 시계 제작자 집안에서 태어난 H. 모저가 1820년대 후반 자신의 이름을 건 시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2015년 700만 개 이상이 팔린 애플워치의 약진에 위기를 느낀 것 같다. 다른 스위스 브랜드들이 스마트워치를 만들거나 커넥티드 워치를 시도할 때 이들은 다른 길을 택했다. 기계식 시계 제조사가 커넥티드 워치를 만드는 건 한물간 제품을 통해 쉽게 새로운 시장에 안착해보려는 기회주의적 발상이라 여겼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스마트워치 디자인에서 영감받은 진짜 기계식 시계를 만드는 거였다. 스위스 알프워치는 그래서 자칫 애플워치처럼 보이지만 아무런 전자식 기능이 없다. 이게 자랑거리이다. 기계식 시계를 차고 쓸데없는 것에서 단절(disconnect)된 후 진짜 사람들과 재결합(reconnect)하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