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많든 적든 상관없어요. 미성년자만 아니면요.” 그래도 자꾸 물었다. ‘김민종처럼 나이 많은 남자 말고 그냥 나이만 많은 남자요, 그래도 괜찮아요?’

Esquire Korea, 2014년
Photographs by KIM TAESUN / 글/최태형 스타일리스트/배보영 헤어&메이크업/구현미 장소 협찬/JW 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이그제큐티브 디럭스 스위트룸)

“그렇게 띄엄띄엄 반말하지 마. 너랑 나 열일곱 살 차이야!”

오랜만에 드라마 <신사의 품격>을 다시 봤다. 어쩜 김민종은 윤진이에게 저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나에게도 저런 말을 할 날이 왔으면…. 하긴 나라면 “그래, 말 편하게 해. 열일곱 살 차이면 친구지 뭐”라고 했겠지만 말이다. 아니지. “존댓말 쓰면 멀게 느껴져. 귀엽네 우리 애기”라고 했겠지. ‘연애에 서툰 복학생’처럼….

뭐가 됐든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서 장동건이 아닌 김민종에 빙의했던 이유는 온전히 윤진이 때문이었다. 임메아리(윤진이의 극중 이름)가 까불거리다가 당장이라도 콧물(눈물이 아니다)이 뚝 떨어질 것처럼 엉엉 울 때 두 손 들었다. 아저씨라고 봐도 무방한 김민종한테 띄엄띄엄 반말할 땐 귀여워서 몸이 배배 꼬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렇게 남자들의 로망을 정조준했다. 임메아리를 눈앞에 두고 안 넘어갈 남자가 있을까? 김민종만 빼고 오빠부터 아저씨까지 모두 홀딱 반했다. 하긴 김민종도 결국 넘어가고 말았지…. 단언컨대 그가 ‘사연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면 1회도 넘기지 못하고 넘어갔을 거다.

그런 윤진이를 눈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것도 호텔 스위트룸 침대 옆이다. 화보 촬영 때문에 짧은 머리를 촉촉이 적신 그녀는 화면보다 더욱 성숙해 보였다. 비 내리는 날씨 때문인지 막 잠에서 깬 듯 뽀얗고 싱그러웠다. 하얀 피부가 사람을 설레게 했다. ‘윤진이가 내게도 털털하게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면 어쩌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오빠답게 물었다.

Q. 촬영은 힘들지 않고 재미있었니? 아… 아니 재미있었어요?

“네, 호텔에서 촬영하니까 집처럼 편안했어요.”

Q. 그래요? 그럼 다음번에는 우리 집에서 해야겠네. 더 편하게….

“네?”

정적이 흘렀다. 윤진이는 깍듯하게 존댓말을 썼다. <신사의 품격> 속 메아리와는 조금 다른 첫인상이었다. 차분하고 어른스러웠다. 나한테만 선을 긋는 건 아니었겠지…. 복학생 스타일의 유머가 문제였을 수도 있다.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대중 앞에 등장했다. 톱스타들이 줄줄이 포진한 주말 드라마에서 인상적인 배역으로 첫선을 보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나이 많은 주연들 사이에서 혼자만 통통 튀는 꽃 같은 배역을 맡는다는 건 더더욱 그렇다.

“제가 다니는 대학교로 지금 소속사에서 단체 오디션을 보러 왔어요. 운 좋게 회사에 들어가게 됐죠. 소속사가 생기고 3개월 후에 <신사의 품격> 오디션을 봤고요. 그렇게 시작하게 된 거죠.”

혜성 같은 등장 탓에 드라마 같은 캐스팅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사실 유명한 배우들 사이에서 주요 배역으로 데뷔해 친척 중 누군가 방송국에 있나 싶기도 했지만 그런 건 없었다. 남들보다 수월한 데뷔를 한 것 같아 물었다.

Q. 엄청 쉽게 시작했네요.

“저는 <신사의 품격>에 누가 나오는지도 몰랐어요. 아는 게 없이 회사에 들어갔고 바로 데뷔해서 어려운 부분도 많았죠. 쉽진 않았어요.”

하긴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참 힘들었겠다고 달래며 분위기를 바꿀 마음에 또다시 물었다.

Q. 어떤 일이 제일 힘들고 고생스러웠어요?

“음… 아무래도 대학교 다니면서 연극도 하고 무대 작업도 해보고 하는 게 힘들었죠.”

Q. 아니요. 고생스러웠던 데뷔 뒷얘기 같은 거요.

“어… 고생은 입시 때 좀 했던 것 같아요.”

Q. 하하, 그건 입시지 고생이 아니잖아요. 무명이 길었다든지 오디션을 100번 봤다든지 하는 거 없었어요?

“음… 전 운이 좋았어요. 그런 거 없어요. 하하하.”

덩달아 웃음이 ‘빵’ 터졌다. 귀여운 얼굴을 찡그리며 고민하다 얼굴을 활짝 펴며 웃는데 같이 웃음이 났다. 사랑받고 자란 막냇동생 같았다. 고생 얘기를 해달라고 조르니까 찾고 찾다 없다고 이실직고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인터뷰 전 말주변도 숫기도 없다며 걱정하던 매니저의 말이 떠올랐다. 윤진이는 어른스러운 척했던 게 아니었다. 낯을 가렸던 것뿐이란 생각이 들어 마음이 풀렸다. 그녀가 다시 1990년생 임메아리로 보이기 시작했다. 한바탕 같이 웃어서인지 분위기는 많이 좋아졌다. 어쩌면 그녀에게 기대한 임메아리의 모습이 보여서였는지 모른다.

사실 윤진이의 이미지는 임메아리 그 자체다. 신인 배우가 연예계에 안착하려면 필연적으로 맞바꿔야 하는 게 고정된 이미지다. 그래야 인지도가 생긴다. 이미지에 갇히든 뚫고 성장하든 그 다음 문제다. 그리고 그건 스스로 풀 수밖에 없는 숙제이기도 하다.

“벌써 2년 됐어요. 임메아리로 알아봐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좋기는 했어요. 식당에 가면 밥도 많이 주시고요. 그런데 윤진이보다 다들 메아리로만 봐주시니까 그게 오히려 불안하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쉬었어요. 이미지 변신을 할 수 있는 역할을 기다렸죠. 그리고 맡은 배역이 <천명>에서 산적 딸이에요.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노력 중이에요.”

이제는 윤진이를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면 <응답하라 1994> 속 도희(극중 윤진이)가 먼저 나온다. 이미지 변신을 원한다곤 하지만 불안하거나 아쉬운 점도 있지 않을까?

“도희 씨 인기에 제가 묻히는 거 같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저도 <응답하라 1994>에 카메오로 나왔으니까. 제가 경쟁심이 좀 없나 봐요. 라이벌이라고 생각하거나 남의 배역이 부러워 화나는 건 없어요. 그냥 전 오래 연기하고 싶어요. 그래도 주목은 조금 받아야 서운하지 않겠지만요.”

윤진이는 그사이 몇 편의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지만 메아리 역할만큼 주목받진 못했다.

“요즘은 장진 감독님의 새 영화에 여주인공으로 촬영 중이에요. 자연스러운 연기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있어서 좋아요. 나중에는 주름도 고스란히 보여줄 수 있는 영화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녀는 최근 조인성이 주연을 맡고 노희경 작가가 글을 쓴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의 출연을 앞두고 있다.

“조인성 씨를 배신하는 전 여자친구로 나와요. 포털 사이트에는 주연이라고 적혀 있지만 임팩트 있게 잠깐 출연하는 역할이에요. 조인성을 버리는 여자친구라니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좋아요. 주연인지 조연인지는 별 상관없어요. 뭐든 할 수 있는 멀티 연기자가 되면 좋겠어요.”

윤진이가 연기 얘기를 하며 눈을 반짝였다. 힘든 일도 있겠지만 얼굴은 마냥 재미있어 보였다.

“아빠가 처음에 연기자는 배고픈 직업이라고 반대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힘들진 않아요. 하하하. 그래도 정말 열심히 하고 있어요.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면 결국 힘들게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요.”

윤진이는 솔직했다. 귀엽고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여전히 천방지축 임메아리로 보였지만 뭐든 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 예뻤다. 지금보다 앞으로의 연기 변신이 더욱 기대됐다. 물론 안 그랬어도 마냥 예뻤을 거다. 문득 내겐 왜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지 않는지 서운했다. 그래서 물었다.

Q. 대체 어떤 남자가 좋아요? 연애할 생각은 있어요?

“물론이죠! 연애하고 싶어요. 회사에는 비밀로…. 미성년자만 아니면 나이는 많든 적든 상관없어요! 편안하게 해주는 남자라면요. 하지만 남자가 먼저 대시해야 해요. 전 먼저 말 못해요.”

다시 물었다.

Q. 김민종처럼 나이 많은 남자 말고 그냥 나… 나…. 아니, 나이만 많은 남자요. 그래도 괜찮다는 거죠?

그녀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목소리에서 꿀 향기가 나는 듯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