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는 언제나 여성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TV 속 착취의 대상은 남자다.

Esquire Korea

“거기는 좀… 안 돼요.”

“우와! 가슴 좀 봐.”

“엉덩이 좀 보여줘요. 윗도리 좀 벗어봐.”

“가슴 한 번 만져봐도 돼요? 안 되긴 뭐가 안 돼.”

“한 번만 안아보자.”

“좋다. 좋다. 쪽. 계 탔네.”

“으악.”

자지러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TV 화면 위에는 큼직한 자막이 박혔다. ‘꿈이야 생시야~’ 우리는 친구 집에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친구의 어린 여자 친구 덕에 10살가량 차이 나는 남녀가 둘러앉은 자리였다. TV에게 기대한 역할은 배경이었다. 그저 조명과 최소한의 공통 관심사를 만들기 위해 틀어놓은 거다. 그런데 억척스러운 코미디언 목소리가 주제 파악을 못 하고 TV를 뚫고 나왔다. 리모컨을 들고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우리는 어린 여자들과의 술자리에 집중하고 싶었다. 소리를 줄이자 오히려 더욱 집중하기 힘들었다. 숨죽인 화면은 오히려 더 적나라했다. 화면 속에선 상의가 벗겨진 남자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만의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흡사 포르노를 보는 것 같았다. 남자들에겐 익숙한 화면 구성이고 전개다. 여럿이 한 명을 둘러싸면 이제 도리가 없다. 음침한 웃음과 난감한 표정이 교차했다. 다른 점이라면 황금 시간대 둘러앉아 본다는 것, 성적 착취와 희롱의 대상이 남자라는 것이다. TV 속 여자들의 욕구와 요구는 노골적이다. 명백한 폭력이다.

“오빠, 복근 있어요?”

“에이, 무슨 복근이 있겠어.”

“근육 좀 눌러봐도 돼요? 그냥 살인가? 물렁물렁할 것 같은데?”

“남자의 매력은 복근인데, 아니다. 남자는 엉덩이지 작고 바짝 붙은 엉덩이!”

여자들의 웃음이 이어졌다.

분명 음소거 버튼을 눌렀는데…. 치킨을 뜯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20대 초반 여자들의 눈길이 내 배에 꽂혔다. 배가 따끔한 것 같아 힘을 줬다. 엉덩이는 당장 어찌할 수 없어 곤란했다. 이게 다 치킨을 문 입과 들고 있는 손 때문인 것 같았다. 민망해서 더는 식탁에 손을 올리지 않았다.

“너 가슴 크니?” “에이, 무슨 그게 가슴이야.” “가슴 좀 만져 봐도 돼?” “그냥 살찐 거 아니야?” “물렁물렁할 것 같은데?” “여자의 매력은 가슴이야.” “아니다 골반이 커야지! 탄력 있는 엉덩이!”

그렇게 응수하고 싶었지만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이다. 남자들끼리 히죽거리며 하는 얘기지 면전에 두고 여자에게 할 얘기는 아니다. 물론 이런 대화가 오고 가는 곳을 알고는 있다. 남성들의 사회에서 일그러진 밤 문화의 모습이 이렇다. 대놓고 이런 얘길 하려면 그만큼 돈을 지불해야 하거나 사회적 매장을 각오해야 할 정도의 언사다. 무엇보다 명백한 건 TV에서 보거나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TV 속 여성들의 폭력은 염치가 없다.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도 없고 의식도 없다. 폭력이라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않거나 못하니 반성 또한 있을 리 없다.

그동안 성의 상품화는 언제나 여자들의 담론이었다.

언제나 폭력은 여성을 향한다고 말했다. TV에서 미스코리아 중계를 못 하게 막은 것도 여성 단체였다. 그들은 남자들의 기준에서 여성을 평가하는 게 여자를 있는 그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폭력이라고 했다. 여자들이 허리를 세워 몸매를 과시하고 가슴을 내밀어 매력을 드러내는 것이 남성 중심적 사회의 문제라 몰아세웠다. 약자인 여성들이 요구받은 일종의 성폭력으로 봤다. 성의 상품화는 그래서 ‘여성’의 상품화를 지칭했다. 그러나 지금 TV 속에서 남자의 옷을 벗기는 건 여자다. 그러나 누구 하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성 역할의 그릇된 모습을 보여주는 건 여자가 남자의 옷을 벗겨 가슴을 주무르는 것도 매한가지다. 그런데 침묵한다. 억압의 주체가 바뀌었다고 한들 명백한 성차별이다. 수세기 동안 피해자였던 여성이라도 가해자가 된다면 자기 검열과 반성이 있어야 한다. 묵인하고 용인한다면 피차일반이 된다. 그러나 성차별을 반대했던 그 많던 여성 단체들은 반응이 없다. 한 여성 단체의 미디어운동본부에 물었다. 왜 남성들이 받는 성차별에 대응하지 않느냐고. 물음에 대한 대답은 간단했다. 여성의 권리에만 관심을 둔단다.

프로이트는 성적 욕구와 충동의 ‘리비도’를 남성성과 연결시켰다. 사디즘은 남성적인 습성과 관련짓고, 마조히즘은 여성적인 습성으로 관련지어 성적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남성적인 것을 능동성으로, 여성적인 것은 수동성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성 구분이 아니다. 성별에 따른 생물학적 특성에 기인해 자연적으로 수동과 능동이 나타난다고 봤다. 물론 모든 인간에게 양성적인 성향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나 크게 보자면 성적 욕구와 충동의 공격성은 남성의 본능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TV는 본능과 무관하게 진화하고 있다. 본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문명이 아니라고 한다면 본능을 뒤바꾸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TV는 이를테면 역차별을 용인하는 중이다. 역차별의 이유는 무엇일까?

표면적으로 결론을 내자면 시청률이다. TV의 문제는 언제나 시청률이니까. TV가 이렇게 염치없는 여자들을 용인하는 이유는 그렇다. TV는 여자들을 위한 매체다. 대부분의 시청자는 여자고 여자의 마음을 움직여야 프로그램의 승산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을 대변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남자들을 핀잔 주고 주물러줄 독한 인물의 등장이 필요하다.

공중파 종편 할 것 없이 여러 세대의 남녀가 등장하는 일종의 ‘떼토크’가 유행이다. 유행이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이미 예능의 한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프로에선 여지없이 여성의 권리가 비정상적으로 높다. 남자를 불러내 만지는 경우도 있고, 남편이나 남성을 싸잡아 편협한 시각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굳이 집 밖으로 불러낼 필요없는 얘기들도 그저 우스갯소리로 꺼내어진다. 남자가 부인의 화장실 습관을 시시콜콜 떠드는 것은 용인될 수 없는 편집거리지만 여자가 하면 웃어넘긴다. 염치없는 여자들이 용인되고 조장된다.

이는 여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여성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또 다른 여성에 대한 성차별을 자행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남자 아이돌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여자 코미디언을 불쾌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여자도 많다. 모든 여자들이 나이를 먹으면 무례하고 억세고 음탕해지는 건 아니다. 여자를 순종적으로 만들고 성적 대상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비정상적인 권리를 용인하는 것도 남녀 성 역할의 심각한 위협이다. 남성을 위해서도 여성을 위해서도 균형 있는 염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인용구] 지금 TV 속 여성들의 폭력은 염치가 없다.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도 없고 의식도 없다. 폭력이라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않거나 못하니 반성 또한 있을 리 없다.

[박스] 테스토스테론을 어쩌겠는가

남성 호르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테스토스테론이다. 남성으로서 성징을 나타내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호르몬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30세부터 감소하며 남성성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 박스에는 테스토스테론의 자가 측정법을 설명하려고 했는데 너무 감성적인 방법들이라 관두겠다. ‘삶에 대한 즐거움을 잃었나?’ 따위의 질문들이라니…. 테스토스테론이 떨어지면 남성 갱년기 증상이 나타난다. 그 증상이란 것도 사실 뼈가 약해지고, 성 기능이 저하되는 식이다. 우울하고 활력이 없어지는 것도 그렇다. 사람이 늙어가는 과정과 별다를 게 없다. 호르몬 주사를 맞을 게 아니라면 테스토스테론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아서 뭐 어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