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느다란 다리지만 걸음은 성큼성큼 경쾌하다. 여린 듯 좁은 어깨가 들썩일 땐 언제 그랬냐 싶게 다부지기도 하다. 작고 동그란 콧방울을 씰룩거리다가 ‘으하하’ 하는 웃음이 터진다. 류혜영이다.

Esquire Korea, 2015년 11월
Photographs by KIM YEONGJUN / 글/최태형 스타일리스트/최경원 헤어&메이크업/지희

요 몇 년간 기억에 남는 한국 영화를 꼽자면 손가락을 다 접어도 모자란다. 한국 영화의 성장이 한풀 꺾여 바람이 빠졌다고 걱정하는 게 엄살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런데 기억에 남는 신인 배우를 찾으라면, 그중에서도 여배우를 찾자면 떠오르는 이름이 많지 않다. 그럼에도 여배우 기근이라는 말이 걱정스럽지는 않다. 내가 영화인이 아니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매달 어떤 여배우를 섭외해 인터뷰할지 고민하며 여배우 기근을 몸소 체험하는 중이니까. 그런데도 걱정이 없는 건 아마도 외모를 넘어 인상적인 연기로 깊게 새겨진 여배우들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날카롭게 새겨진 이름이 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녀의 이름은 류혜영이다.

류혜영을 처음 본 건 독립 영화 〈잉투기〉를 통해서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격투 소녀 영자를 연기했다. 누구보다 ‘잉여스럽고’ 솔직하며 거침이 없는 인물. 솔직히 말하자면 예쁜 얼굴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등장만으로 눈부시게 영화를 장악하는 여배우도 아니었다. 어쩌면 저게 본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실토하건대 류혜영을 처음 본 후 생긴 궁금증은 감독을 향해 있었다.

‘감독은 어떻게 저런 배우를 찾았을까?’ 혼자 곰곰이 상상해보기도 했다. 상상은 대략 이렇다.

‘독립 영화 감독이 격투 소녀를 섭외하기 위해 격투기 도장을 찾는다. 그때 한 관장님의 추천으로 여고생을 만나게 되는데 격투를 염두에 두고 추천한 학생이다. 관장은 도장의 명예를 위해 도장에서 가장 힘이 센 여고생을 추천했고 그게 류혜영이다. 감독은 리얼리티를 중요시해 그녀와 작업하기로 결정한다. 운동선수치곤 제법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연기가 아니다. 그저 그녀의 실제 모습이다. 영자는 사실 그냥 류혜영이다.’ 뭐, 이런 스토리다. 물론 이 상상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제법 그럴듯하게 ‘저런 배우를 어떻게 찾았을까?’ 하는 물음에 혼자만의 답이 됐다. 그녀의 연기가 연기가 아닐 거라고 생각한 이유는 아마도 너무 자연스러워서였을 거다.

“저는 예고를 나왔는데, 제가 고1 때 영화 아카데미에서 연출을 전공하던 감독님이 학교로 오디션 볼 학생을 추천해달라고 했어요. 공식적으로 부탁한 건 아니고 졸업한 선배를 통해 부탁한 거였죠. 졸업한 선배는 또 재학 중인 다른 학생한테 부탁하고요. 쉬는 시간에 놀고 있는데 어떤 선배가 교실 문을 열고 ‘너, 너, 너 다음 주에 오디션 보러 가!’ 해서 간 게 독립 영화 〈여고생이다〉였어요. 여섯 명이 가서 두 명이 뽑혔어요. 제가 그중 하나죠. 그렇게 연기를 시작하게 됐어요.”

여섯 명이 응시해 두 명이 배역을 따냈다는 건 그리 높은 경쟁률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 둘 중 하나임을 강조하는 건 자랑이겠지 싶어 “단박에 오디션에 붙었군요!”라고 장단을 맞췄다. 그렇게 대단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보다 궁금한 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여고생(영화 〈여고생이다〉에서 본 그녀는 그랬다) 류혜영이 예고에 진학한 이유였다.

“중학교 생활이 너무 싫었어요. 집과 학교를 오가는 같은 생활의 반복이어서요. 갇혀 있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고등학교에 가면 더욱 심해질 게 뻔하잖아요. 필사적으로 동네를 벗어나고 싶었어요. 앗! 제가 다니던 학교가 쌍문동에 있었어요. 지금 출연 중인 〈응답하라 1988〉이랑 같은 동네! 아차, 그래서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하겠다는 생각 하나로 예고에 가게 됐어요.”

비약을 좀 하자면 재미있는 학교생활을 위해 배우가 되었다는 건데….

“대학 갈 생각은 없었어요. 아니 그땐 대학까진 생각하지도 않았죠. 그저 당장 지금 이 시기를 행복하게 보내자는 생각뿐이었어요. 장래 희망을 물어보면 ‘부자요’ 했으니 말 다했죠. 그러니까 생각이 많지 않았어요.”

털털하게 소파에 걸터앉아 미소 띤 얼굴로 설렁설렁 말하던 류혜영이 돌연 똑바로 눈을 맞췄다. 여린 듯 좁은 어깨를 들썩이고, 발을 동동 구르며 장난스럽게 얘기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단호해 보였던 순간이다.

“그런데 하나! 가장 중요한 생각을 했다고 자부해요. 그리고 예고에 진학한 게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죠.”

어쩌면 말투는 바뀌지 않았을지 모른다. 똑바로 맞춘 눈이 그녀의 말에 힘을 실어준 것일 뿐. 갑자기 그녀를 처음 본 〈잉투기〉에서 특별할 것 없는 여고생에게 특별한 기대를 갖게 했던 건 그녀의 눈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 중요한 생각과 결정이 뭐였나요?”

“현재를 즐기자! 으하하! 이대로는 3년 못 산다.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어요. 정말 3년 내내 즐거웠어요.”

풉! 하고 웃음이 터졌다. 대답 때문이 아니었다. ‘으하하’ 하고 웃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경쾌했기 때문이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에게 유독 호의적인 감독이 많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원신연 감독(〈용의자〉)은 충무로의 눈에 띄는 여배우로 그녀를 치켜세웠고 이해준 감독은 〈나의 독재자〉를 위해 미국에 있던 그녀에게 화상 전화를 통해 특별 오디션 기회를 제공했다. 〈잉투기〉의 엄태화 감독은 몇 번이고 그녀를 추천하고 함께 작업했다). 아마 전작 두 편 모두 큰 흥행을 기록하며 세 번째 시리즈를 구상하던 〈응답하라〉의 신원호 감독 역시 그렇지 않았을까?

“운이 좋았던 거 같아요. 제가 출연한 독립 영화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은 덕에 저도 조금은 알려졌고요. 또 〈응답하라〉 감독님과 작가님이 〈잉투기〉를 볼 게 뭐며, 저랑 비슷한 캐릭터를 쓰고 계셨을 게 뭐예요. 제 운에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런데 역할을 맡은 것까지는 운이지만 그 캐릭터를 어떻게 살리고 사랑받을지는 온전히 제 몫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제 몫을 해내야죠.”

운 얘기를 하다 자신의 몫이 무엇인지 말할 때 류혜영의 짐작할 수 없는 깊이가 느껴졌다. 인터뷰 내내 털털한 여고생 같다가 돌연 여배우의 눈빛을 보이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말하다 또렷한 주관을 드러내는 그녀. 진지하다 싶을 때 ‘으하하(정말 으하하 소리를 내며 웃는다)’ 하는 웃음으로 깊이를 알 수 없게 만드는 류혜영(아마도 ‘으하하’ 하는 웃음에 뭔가가 있는 것 같다). 그녀가 얼마나 깊은지 지켜보고 싶어졌다. 이제 막 시작된 〈응답하라 1998〉이 회를 넘겨 절정에 다다를 쯤이면 짐작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