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quire Korea, 2015년 12월
글/최태형 사진/이혜련 스타일리스트/배보영 헤어&메이크업/이소연
그녀는 한껏 겸손히 말했다. “그래도 연극 무대에선 열 손가락 안에 들지 않을까요?” 연극 무대에서 눈에 띄는 여배우를 꼽을 때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기까지 굳이 열 손가락이나 필요치 않다. 그 사실을 말해줄까 하다가 묵묵히 듣기만 하기로 했다.
저는 연극배우예요. 지금은 연극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을 한창 연습 중이죠. 자폐아의 성장기에 관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는 책 읽어주는 선생님으로 나와요. 되게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또 다르게 생각하면 매우 쉬운 역할이에요. 아마 절 보시고 느껴지는 이미지를 떠올리면 될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이런 역할이 저에게 주어지는 스테레오타입 같은 배역이기도 해요. 제가 누군지 모르셔도 조금은 이해가 되죠? 극 중에서도 자폐아 주변 인물 중 가장 안정적이고 평면적인 역할이고요. 아무래도 선생님이라는 역할이 그러니까요. 이 작품에서 캐릭터가 매우 세다거나 독특하진 않아요. 그렇다고 연습이 쉽다는 건 아니에요. 이번 연극은 압구정 BBC 아트홀에서 하는데 전반적인 준비가 많아요. 무대 장치나 영상 같은 게 스케일이 크거든요. 반면 무대 위의 요소는 모두 배우들이 직접 몸으로 만들어야 해요. 물건, 도로, 상황을 배우가 몸으로 표현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아주 힘들게 연습하는 중이죠.
올해는 일 년 내내 연극 무대에 올랐어요. 작년 말부터 이어진 연극까지 치면 6~7편 정도죠. 10월 한 달간은 연극 〈만추〉에서 애나 역을 맡았고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카포테 트릴로지〉에서 여자 주인공을 맡았어요. 〈카포네 트릴로지〉는 세 가지 다른 연극을 옴니버스 스타일로 묶은 독특한 형식이라 엄밀히 말하면 3편이라고 볼 수 있죠. 그렇게 따지면 열 작품가량 출연했네요. 보통 극의 막을 올리기 전에 6~7주가량 합을 맞춰요. 그러니까 거의 한 달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내내 연기를 한 거죠. 그래도 〈카포네 트릴로지〉에서처럼 배역의 캐릭터가 도드라지거나 이전 배역과 상반되면 연기하기 편해요. 그런 연기는 어쩌면 공식 같은 게 있으니까요. 올해 가장 힘들었던 건 〈스피킹 인 텅스〉였어요. 다른 남자와 바람난 우울한 여자, 결혼을 약속한 남자를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는 이상한 여자를 연기했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저와는 너무 반대의 캐릭터라. 우울함 이런 거 전 별로 없거든요. 사실 그렇게 복잡한 성격도 아니고요.
연기를 시작하게 된 것도 튀고 싶다거나 내가 남다르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에요. 그냥 울산에 사는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고1 때 연극반을 해본 친구가 학교에 연극반을 만들고 싶어 했어요. 그러려면 부원이 필요했는데 그 친구가 교실을 돌아다니면서 부원을 모았죠. 일종의 스카우트 같기도 했어요. ‘너, 너, 너 같이 하자’ 뭐 이런 식이었거든요.
뭐 고등학교 때는 그저 서클 활동이었지 꼭 배우가 되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러다 고3 때 대학을 고르면서 연극을 해볼까 싶었던 거죠. 그렇게 한예종 연극원에 들어가게 됐어요. 고3 7월경에 일종의 수시 합격이었죠. 그렇다고 연예인이 되겠다든가 유명인이 되고 싶은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하다 보니 연기가 재미있었고 한 번에 한예종에 합격하게 되면서 길이 정해진 거죠. 대학에서도 연기를 계속했지만 학교 분위기상 연예인보다는 연극인, 배우가 되려는 사람이 많았어요. 저 역시 배우와 연예인은 다른 직업이라고 생각했고요. 보통 대중 앞에 서는 사람은 나르시시즘이 아주 강하고 드러내는 걸 좋아하잖아요. 전 그런 성격은 아니에요. 연극반 선생님이나 주변에서 잘한다는 얘기를 해주는 게 기분 좋은 정도였죠. ‘내가 제일 잘났어, 잘해’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본격적으로 연극 무대에 오른 건 2004년 한예종을 졸업하면서부터예요. 같이 졸업한 선배들이 공연 배달 서비스 ‘간다’라는 극단을 만들었는데 저도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됐죠. 말하자면 창단 멤버인데, 뭐 그렇게 대단한 생각을 갖고 참여한 건 아니에요. 그저 동기들, 오빠들과 함께 학교생활이 극단 활동으로 이어진 거죠. ‘대중에게 공연을 더욱 쉽게 알려야겠다’는 포부보단 그저 제 연기를 잘하고 싶은 생각이 커요.
연극 관중의 80~90퍼센트가 여자이기 때문에 사실 여배우의 자리는 많지 않아요. 연극이 남자 배우 중심이 되면서 대부분 여자 배역은 그저 극의 기능적인 부분만 담당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대극장 뮤지컬처럼 판에 박힌 캐릭터, 그저 극에 필요한 요소가 되는 거죠. 그래도 저는 상당히 매력적인 역할을 많이 맡았어요. 감사할 일이죠.
연극 구조가 남자 배우 중심이라거나 해도 불안하거나 초조하진 않아요. 한국이 작아도 한 해에 무대에 오르는 뮤지컬이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많다고 하잖아요. TV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하기도 하지만 그걸 목표로 하지도 않고요. 전 그저 제가 출연한다는 것만으로 대중이 믿고 볼 수 있는 배우가 됐으면 해요. 지금은 한 60퍼센트 목표에 다다른 것 같아요. 아, 동경하는 배우는 있어요. 하정우 씨와 함께 〈더 테러 라이브〉에 나왔던 김소진 선배요. 범접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어요. 처음에는 너무 독특해서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 같다가도 빠져드는 매력이죠. 저한텐 그런 건 없는 것 같거든요. 전 좀 특색이 없지 않아요? 그래도 뭐 만족해요. 저도 연극 무대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는 드는 여배우거든요. 즐거워서, 더 잘하고 싶어서 하는 동경이고 고민이에요. 연기를 하며 가장 큰 보상을 받고 있는 게 저니까요. 연기를 하면 행복해요. 아, 너무 말이 길었네요. 이제 연습하러 가야 하는데. 그런데 왜 제게 인터뷰 요청을 하신 거죠? 궁금하네요. 제가 잘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