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quire Korea, 2015년 10월
글/최태형
시계에는 정반대의 두 가지 이미지가 동시에 존재한다. 두 이미지는 너무나 다른 것으로 양극단에 위치해 있다. 하나는 알다시피 장인 정신에 기반을 둔 고급품이라는 이미지다. 또 다른 하나는 부패와 부정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이미지 중 어떤 게 사람들에게 더욱 각인됐을까? 모르긴 해도 한국에서는 사치품 혹은 부패의 상징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좀 더 많을 것이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시계가 오명을 갖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실제로 그렇게 사용되거나 그렇게 비쳤기 때문이다. 물론 시계의 문제는 아니다. 자신의 통장 잔고를 숫자가 아닌 시계로 드러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문제라면 모를까.
TV 쇼에 나와 가난과 눈물을 팔아 유명해진 래퍼가 금빛 롤렉스를 차고 허세를 부리는 모습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위상 변화를 단적으로 드러내 과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롤스로이스와 금빛 롤렉스를 마치 필수 요소인 듯 차고 나오기 때문이다. 미디어에 비친 모습도 마찬가지다. 영화 <해무>에는 불법임을 알면서도 돈을 위해 밀항자들을 돕는 선원들이 등장한다. 이를 주도한 강 선장의 손목에는 금빛 롤렉스가 반짝거린다. 시계는 이때 천박한 자본주의의 민낯을 상징한다. 강 선장과 선원들의 계급을 나누는 일종의 징표이기도 하다.
부패의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시계는 고액 뇌물 스캔들의 단골 메뉴이다. 피아제 시계가 서민적인 대통령에게 한순간 부패의 이미지를 덧씌울 수 있는 것도 그동안 쌓아온 시계의 이미지 때문이다.
비단 한국에서만의 얘기는 아니다. 얼마 전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공보실장 드미트리 페스코프가 찬 시계가 화제가 됐다. 그가 공식 석상에서 착용한 시계는 리차드 밀의 스켈레톤 시계인 RM 52-01이었다. 해골 모양으로 뼛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한 이 시계의 가격은 한국 돈으로 무려 7억여 원에 이른다. 공보실장의 공식 연봉이 1억 중·후반인 걸 감안하면 그에게도 결코 싸다고 할 수 없다. 자연스럽게 부패가 연상되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러시아의 한 일간지가 러시아 관료들이 착용한 시계와 공식 재산 내역 그리고 연봉을 정리해 발표한 자료가 여기에 힘을 보탰다. 수많은 관료들이 연봉의 몇 배에 달하는 시계를 차고 있었는데 그중 모스크바 시 건설 부문을 담당하는 부시장 블라디미르 레신의 시계는 드윗 시계로 무려 13억원에 달했다. 공직자 연봉으로 구매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건 모두의 생각이었다. 선물로 받았다는 부실한 해명 역시 시계를 온전히 시계로만 보게 하지 않았다. 참고로 러시아의 부패 인식 지수가 2015년 174개국 중 136위인 걸 보면 공직자의 시계를 부패의 척도로 생각하는 것도 영 틀린 것만은 아니다.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시계가 오명을 얻게 된 이유는 시계 제조사의 끊임없는 장인 정신 때문이다. 시계의 가치를 끊임없이 높이려는 노력이 있어서였다. 시계를 뇌물로 주거나 과시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건 시계가 곧 돈이라는 공식이 어디서나 통용되는 이유다. 이를 환금성이라고 한다. 언제 어디서든 시계를 돈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온통 금으로 만들어 부품마다 금장 도장을 찍는 피아제 시계는 금보다 더 비싸게 쳐줄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계의 오명은 정확히 위상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2013년 CJ 이재현 회장이 조세 포탈, 횡령·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을 때 전군표 국세청장에게 로비하기 위해 준 시계가 프랭크 뮐러로 알려졌다. 이때 시계 마니아들은 적어도 5~6년 전에 시계를 전달했을 거라 예상했다. 이유는 시계 브랜드에 있었다. 역사가 짧은 프랭크 뮐러 시계가 트루비용, 컴플리케이션 시계를 만들어내며 높은 평가를 받았을 때가 2002년에서 2006년 사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6년 국세청은 이재현 회장의 탈세 정황을 확인하고도 세금을 추징하지 않았다.
명품과 사치품은 한배에서 나온 쌍둥이다. 명품이라는 말이 최고의 작품을 의미하는 말이면서도 종종 사치품이라는 말로 대체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명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과 결실을 모두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모든 아름다운 것에 따라붙는 시기와 질투라고 생각한다면 모를까. 시계의 오명은 곧 위상의 척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