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칼을 들지 않기로 했다. 마치 절필을 선언한 글쟁이처럼 말이다. TV를 점령한 ‘요리하는 남자’들 때문이다. 요리는 내가 먼저 했는데 이제 와 유행 따라간다는 소리를 듣는 게 싫어서다. 요리할 이유가 없어져서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제 요리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남자답게 먹기만 할 거다.

Esquire Korea, 2015년 9월
EDITOR 최태형 | FOOD STYLIST 문인영 | ASSISTANT 황규정 | LOCATION 성수2가 1동 101recipe / PHOTOGRAPHER PARK NAMKYU

요리를 해야 한다고 느낀 건 어쩌면 본능이었다. 생존 본능.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요리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매 끼니를 밖에서 처리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모든 야식을 라면으로 통일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주말이면 세 끼 모두 밖에서 먹거나 세 끼 모두 라면으로 때우는 일도 벌어졌다. 급기야는 끼니를 거르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진한 MSG에 취해 꾸벅꾸벅 조는 일, 밀가루 음식을 먹고 더부룩한 속으로 하루를 보내는 일에 지쳤기 때문이다. 몸이 축나는 게 느껴졌다. 먹는 건 부실한데 몸은 실해졌다. 속은 공허한데 배는 불룩해졌다. 더 이상 이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칼을 들기로 했다.

집에서 요리를 하기로 결심했지만 난감했다. 도통 뭘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라 서른 살까지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은 남자였다. 혼자선 달걀 프라이도, 김치볶음밥도 해보지 않았다. 내 탓만은 아니었다. 부엌에서 달걀이라도 삶으려 하면 호통이 떨어지는 집이었다. 아버지는 사내자식이 달걀 먹겠다고 달그락거리는 건 아니라고 했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건 좋은 모습이 아니라고 했다. 뭐가 아니란 건지, 어떤 모습이 별로란 건지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땐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덕에 누나에게 라면 끓여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기도 했다. TV 드라마에선 대발이 아버지가 대문 좀 늦게 연다고 노발대발하고 마음에 안 들면 “당장 보따리 싸서 나가!” 하고 호통치던 시절이었다. 지금 같으면 난리가 났겠지만 그땐 이상할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어쩜 우리 집이랑 똑같네’ 하며 웃어넘기던 때였으니까.

펜을 들었다고 글을 쓸 줄 아는 건 아니다. 똥 같은 글이라도 시간이 필요하다. 칼도 마찬가지였다. 칼을 들었다고 해서 당장 요리를 할 순 없었다. 배워야 했다. 그때부터 친한 형을 들들 볶았다. 일본에서 유명 요리 학교를 졸업하고 온 형이었다. 당장 눈앞에서 파스타를 만들어보라고 종용했다. 스테이크를 레어부터 웰던까지 구워보라고도 했다. 다행히도 나는 제법 소질이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어려서부터 공작 놀이를 좋아했다. 비누 조각 대회나 그림 그리기 대회 같은 데서 제법 상도 탔던 손재주 때문이었겠지. 요리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만 일찍 요리의 맛을 알았더라면 아마도 셰프가 됐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때부터였다. 주말이 멀다 하고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파스타를 만들어주기도 하고 스테이크를 굽기도 했다. 이렇게 몇 번의 베타 테스트를 마치자 요리에 자신감이 붙었다. 제법 나만의 비법도 생겼다. 어느 정도 요리 실력이 늘었다고 생각한 후부터는 여자를 불러들였다. 멀끔하게 흰 셔츠를 꺼내 신경 쓰지 않은 듯 소매를 둘둘 걷어붙였다. 허리엔 앞치마를 둘렀다. 그러면 무심하면서도 섬세한 남자, 요리하는 자상한 남자 코스프레가 완성됐다. 팔에 굵은 핏줄이 서도록 손을 높이 들고 소금을 푸다닥 푸다닥 뿌리면 끝났다. 월계수잎을 얹어 허세를 들키지 않을 정도의 진지함을 더하면 그때부턴 여자의 마음을 요리할 수 있었다. 와인은 분위기를 돋우는 기폭제로 삼았다. 좋아하는 품종 하나만 있어도 반은 전문가 행세를 할 수 있다.

그때부터였던가, 요리하는 남자가 TV를 점령하게 된 게? 한창 요리에 맛을 들이고 있는데 TV에 셰프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셰프뿐만이 아니었다. 너도나도 요리를 했다. 특이한 건 모두 남자들이었다. 가수도 만화가도 기자도, 급기야 PD마저 카메라 앞에서 요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TV에 나오는 사람부터 TV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까지 온통 TV는 요리하는 남자로 점령당했다. 다들 저마다 TV에서 요리를 뽐냈다. 누구는 내가 하던 소금 뿌리기 허세를 똑같이 재연했고 누군가는 여자의 마음을 홀리는 요리를 선보였다. 재미있었다. 오랜만에 정신을 놓고 TV를 봤다. 냉장고에서 아무렇게나 꺼낸 음식이 예술로 변했다. 셰프의 허세 넘치는 몸짓이 허세로 끝나지 않고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맥이 빠졌다. 뭘 해도 아류가 된 것 같았다. 기분이 나빴다. 그때부터 요리를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먼저였는데 이젠 워너비가 됐다. 얼마 전까지 음식을 만들어주면 멋지다고 했던 여자 친구는 “소금을 더 넣어야쥬~” 했다. “떫은맛은 설탕으로 잡아야쥬~” 하고 훈수를 두기도 했다. 종종 앞치마를 두른 모습을 보곤 최주부라 불렀다. 요리하는 훈남을 보고 ‘백주부’를 떠올리다니…. 요리해봐야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 관뒀다.

아버지의 말씀이 옳았다. “남자가 뭐 먹겠다고 저렇게 달그락거리는 거 별로야”, “그래, 남자는 막 아무거나 잘 먹으면 되지”. 그때부터 TV에 요리하는 남자가 나오면 내가 한 말이다.

이번 특집에서는 요리하지 않기로 했다. 요리는 무슨…. 돼지 삼겹살을 통으로 사다가 굽기로 했다. 삼겹살에 소금과 후추를 뿌리고 오븐으로 가져갔다. 돼지 한 마리의 삼겹살을 모두 산 건 좀 과했나? 고기가 너무 커서 오븐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칼을 꺼내지 않았다. 삼겹살을 롤케이크처럼 돌돌 말았다. 모양을 잡기 위해선 명주실을 사용했다. 야동에서 본 본디지처럼 꽁꽁 묶었더니 제법 그럴싸했다. 어찌 됐건 좋아하는 비주얼이니 OK. 그리고 오븐에 구웠다. 노릇노릇 그럴듯한 음식이 나왔다. 요리가 아니다. 그저 먹을 수 있게 익힌 거다. 제법 남자다운 맛과 포스다. 그래! 접시에 깨작거리는 요리는 남자의 몫이 아니다. 이렇게 먹어야 남자다! 흥.

[박스] CHEF’S TIP

양파와 마늘, 사과를 볶을 때 오레가노 파우더나 바질 파우더를 뿌리면 향이 더 좋아진다.

오븐에 고기를 구울 때 한쪽에만 열이 가해지지 않도록 적당한 시기에 고기를 돌려 넣는다.

[박스] THE RECIPE

재료

돼지고기 오겹살 1판, 사과 1개, 양파 1개, 마늘 20쪽, 쪽파 10대, 올리브 오일 약간, 소금 약간, 후춧가루 약간, 시판 토마토소스 1컵, 시판 스위트칠리소스 1컵, 페페론치노 10개, 셀러리 잎 적당량

만들기

1 마늘은 꼭지를 제거한 후 칼등으로 눌러 납작하게 만들고, 양파는 굵게 다진다.

2 사과는 웨지로 얇게 편으로 썬다.

3 달군 프라이팬에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양파와 마늘을 볶다가 향이 나면 사과를 넣고 볶는다.

4 오겹살은 핏물을 제거하고 소금과 후춧가루를 뿌려 밑간한다.

5 한 김 식힌 3을 4 위에 올린다.

6 한쪽 면부터 단단하게 말아 실로 고정한다.

7 고기가 벌어지지 않도록 꼬치로 찔러 고정한 후 여분의 실로 단단하게 묶는다.

8 오븐 팬에 올려 200도로 예열한 오븐에 1시간 정도 구운 후 180도 오븐에 속까지 익도록 30~40분 더 굽는다.

9 스위트칠리소스와 토마토소스, 페페론치노, 셀러리 잎을 한소끔 끓인다.

10 8의 고기를 1cm 폭으로 도톰하게 썰어 9의 소스를 곁들여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