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quire Korea, 2015년 11월
글/최태형

매력적인 남자라면 자고로 반전이 있어야 한다. 수 싸움에서 읽히지 않는 야생성이야말로 남자의 가장 근본적인 매력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남자는 뻔한 남자다. ‘생긴 대로 논다’는 말이 욕인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뭐 아님 말고…. 말쑥한 슈트 차림이라면 대범한 몸가짐이 필요하다. 그런지 룩에는 오히려 스마트하고 스위트한 행동거지가 필요한 것처럼. 슈트에 얌전한 태도는 샌님 같아 보일 수 있고, 그런지 룩에 거친 몸가짐은 그냥 불한당일 뿐이니까. 길들여짐과 길들여지지 않음이 공존할 때 비로소 남자만의 매력인 복잡성이 배가된다. 상반되는 두 이미지의 접점 위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길들일 수 없어 더 매력적이라는 말이다.

올해 워치스 앤드 원더스에서 리차드 밀의 에로틱 RM69 트루비용을 보고 통쾌함을 느낀 것도 같은 이유다. 리차드 밀이 선보인 RM 69 트루비용은 이름 그대로 성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시계다. 시계 다이얼 위에 위치한 3개의 롤러에는 마치 파친코처럼 서로 다른 문구가 각인되어 있다. 이 롤러는 10시 방향의 푸시 버튼을 누르면 랜덤으로 조합되는데 이 문구들이 꽤나 노골적이다. RM 69의 홍보용 이미지에 노출된 문구는 “너를 미친 듯이 애무하고 싶어”라는 조합이 맞춰져 있다. 제법 점잖은 문구라고?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워치스 앤드 원더스에서 리차드 밀이 RM69 트루비용을 소개하며 전 세계 프레스에게 보여준 문구니까. 그러나 역시 반전이 있었다. 마치 시스루 백케이스를 소개하는 척하며 보여준 뒷면에 거꾸로 비친 문구는 차마 번역해 옮길 수 없을 정도다. 짧은 시간에 거꾸로 비친 글씨지만 리차드 밀의 짓궂고 익살스러움을 캐치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궁금하다면 리차드 밀 공식 사이트에서 RM69을 360도 회전시켜볼 것. 은밀하게 드러나는 문구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에로틱 시계는 사실 시계 제작 역사의 한 부분이다. 리차드 밀은 사뭇 점잖은 문구 방식을 택했지만 원래는 다이얼 위에 에로틱한 이미지를 새겨 넣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블랑팡은 꽤나 적극적이고 고차원적이었다. 블랑팡은 17세기 후반부터 ‘오토마타’라 부르는 움직이는 피겨를 시계에 내장시켰다. 시계가 종을 울릴 때 다이얼 위에서 남녀가 왕복운동을 한다든가 하는 식이다. 에로틱 시계는 출시와 동시에 시계 마니아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여기에 힘입어 시계 제조사들이 더욱 노골적이고 은밀한 시계를 만들었음은 당연지사다. 품격 있는 귀족들이 주머니 속에서 에로틱 시계를 꺼내놓고 키득거렸을 걸 생각하면 시대를 뛰어넘는 동질감이 느껴진다. 뭐랄까, 전교 1등 하는 친구를 꾀어내 선생님 몰래 같이 나쁜 짓 하는 느낌이랄까? 그러면서도 ‘이게 다 기술력을 보여주는 거야’라고 뻔뻔히 말한다거나 ‘모든 예술은 에로틱하지’라고 능청 떠는 것을 보면 엄숙주의 꼰대들에게 한 방 먹이는 것 같아 통쾌하기도 하다. 물론 꼰대들(?)이 가만있었던 건 아니다. 스위스 제네바와 종교 당국은 방탕한 표현이 담긴 시계를 몰아내기 위해 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에로틱 시계의 생산을 금지시키고 시중에 나와 있는 시계마저 압수해 부숴버렸다. 예상했겠지만 이 덕에 이미 진귀한 에로틱 시계는 몸값이 더욱 올라갔다. 물론 그런다고 시계 제작자들이 에로틱 시계를 만들지 않았을 리 없다. 에로틱 피겨를 시계 정면이나 케이스 뒷면에 새겨 넣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경첩이 달린 케이스백을 만들어 숨겨놓기도 했다. 더욱 은밀해졌고 더욱 높은 기술력이 필요해진 건 물론이다. 덩달아 더욱 진기해진 것도….

에로틱 시계가 자취를 감춘 건 20세기 초반 시계의 흐름이 포켓 워치에서 손목시계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더 작게, 더욱 은밀하게 만들어야 하지만 크기를 줄인 손목시계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도 블랑팡이 한발 앞서 해냈다. 1993년 세계 최초의 오토마타를 갖춘 손목시계를 만들었던 것. 미닛 리피터가 종을 울릴 때에 맞춰 섹스를 나누는 피겨라니….

어쩌면 시계가 남자들의 전유물이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다. 아무리 여성들의 수요가 늘었다 한들 여전히 이 복잡하고 섬세하며 위트 있고 장난스럽기까지 한 작은 우주는 남자들 차지니까. 그나저나 리차드 밀의 RM69 트루비용으로 장난스럽고 음란한 장난을 칠 남자는 어떤 남자일까? 10억짜리 농담을 받아줄 여자가 있기는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