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quire Korea, 2013년 10월
BY SCOTT RAAB / PHOTOGRAPH BY JOE WOOLHEAD (미국판 에스콰이어 번역 기사)

누가 이 건물을 보호할 것인가

얼마 전 나는 2011년 9월 11일 월드트레이드센터 메모리얼 플라자가 문을 연 이래 그곳을 다녀간 800만 명의 관광객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굵은 장대비 때문에 습도가 열대 지방과 다를 바 없던 월요일 정오였다. 거리의 잡상인들은 매일 파는 잡동사니에다가 우산까지 내놓고 호객 행위를 했다. 애연가들은 그라운드 제로를 향해 가는 길가의 건물마다 울레줄레 모여 서서 비 맞은 똥개마냥 독한 냄새를 퍼뜨렸다.

이제부터는 그곳을 그라운드 제로라고 부르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라운드 제로라는 말의 원산지인 히로시마를 떠올리게 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 말 자체가 이곳 다운타운 맨해튼에서는 사람들을 슬프게 한다. 모두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부동산 업자들과 수많은 이웃 주민, 그리고 다리 건너 터널을 지나 이곳까지 와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아마 분명히 그럴 것이다. 면적이 약 6만5000제곱미터에 달하는 그곳을 뭐라고 부르든, 9·11은 언제나 생생하게 남아 있는 매일 매일 새로워지는 기억이다. 내가 고향이라 부르는 뉴저지 주 북부의 글렌 리지에는 뉴욕 시티 트레인 계단 옆 관목 숲으로 둘러싸인 광장 안에 명판 하나가 서 있다. 9·11 사건이 있던 그날,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그 지역 주민 일곱 명의 이름이 새겨졌고, 그 옆에는 성조기 세 개가 꽂혀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수장된 직후 그 깃발이 꽂혔다. 잦아드는가 하면 다시 번지고, 그만 끝나나 하면 다시 시작되면서 그라운드 제로 위를 떠도는 안개 속의 전쟁에서,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은 지금까지 미국이 거둔 가장 확실하면서도 유일하게 이긴 전투였다.

게다가, 프리덤 타워는 세상을 뉴욕 시티와 연결해주는 모든 주요 교량과 터널, 공항을 운영하는 초정부적 거대 기관인 뉴욕·뉴저지 항만국에 의해 2009년 ‘1월드트레이드센터’라고 공식적으로 명명되었다. 월드트레이드센터는 항만국의 소유였다. 상호 의존적이면서 동시에 상호 적대적이었던 두 개의 주 사이에서 경제적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1921년에 조직된 항만국은 두 지역의 공동선에 헌신하기 위해 비정치가를 임명하면 정치가들의 입김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오묘한 구상의 현실적 체현이었다. 그 구상은 어느 정도 현실화되는 것 같았다. 적어도 항만국이 1960년대에 부동산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해 이곳의 약 6만5000제곱미터에 이르는 대지를 압류한 뒤 트윈 타워—다리, 터널, 공항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건물 전체에 임차인을 들이는 데 10년이 걸린—를 짓기 전까지는 그랬다.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는지, 항만국은 지금도 지구상에서 가장 돈이 많이 드는 오피스 타워—40억 달러를 들여 약 24만1500제곱미터 규모의 건물을 짓는다—를, 트윈 타워가 완전히 붕괴되어 사라지고 그 전에는 트럭 폭탄의 공격을 받았던 바로 그 자리에 자랑스럽게 지어놓았다. 그래도 2006년에는 그런 비극적인 역사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자신들이 가진 가장 알짜배기 부동산에 항만국 본부를 입주시키지는 않겠노라고 공언했었다. 그 건물이 바로 프리덤 타워였다.

그런 역발상 마케팅의 공언에도 불구하고, 〈월 스트리트 저널〉은 내가 메모리얼 플라자를 방문하기 일주일 전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 건물을 프리덤 타워라고 부르는 것을 막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글을 실었다. 이 건물의 이름을 다시 지어 붙인 불가사의한 시도의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이 건물은 업무용 건물이지 추모 센터나 추모비가 아닙니다.” 항만국과 계약을 맺고 이 건물의 임대차 계약을 맡고 있는 한 부동산 중개인은 그렇게 말했다— 그 시도가 처참한 실패로 끝난 데에는 조지 파태키의 공이 크다. 그는 뉴욕 주지사로 봉직한 후, 자신이 대통령 재목임을 입증해주기를 바라며 명명했던 고층 건물(프리덤 타워)의 이름 외에는 어떠한 유산도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졌다. 파태키가 ‘프리덤 타워’라는 이름을 들고 나온 것은 2003년이었고, 그때는 이 건물이 2006년이면 완공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던 때였다. 우리가 도박사라면, 아마 항만국은 우리에게 2015년 초쯤이면 이 건물의 개관을 볼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 건물의 재건축에 대해 지난 8년 동안 글을 써온 필자로서가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관광객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 장소 자체는 정말 환상적이다. 진심이다. 메모

리얼 플라자의 넓이만 약 3만2000제곱미터, 새 트레이드센터의 고동치는 심장과 열린 영혼, 이곳에서 숨진 희생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진 동판으로 둘러싸인 두 개의 거대한 구덩이, 쓰러진 쌍둥이 빌딩의 잔해가 조각된 두 개의 상처, 9미터 높이에서 일정한 속도로 떨어지며 뉴욕 시티의 소음을 모두 집어삼키는 물이 찬 두 개의 물웅덩이.

북쪽 웅덩이로부터 메모리얼 플라자 건너편에 담장이 둘러쳐진 프리덤 타워는 1776피트 (약 541미터) 높이로 우뚝 서 있다. ‘1776’은 파태키를 황홀하게 만든, 노골적으로 상징적인 숫자(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해)다. 오벨리스크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모양에 각 모서리를 깎아낸 이 빌딩은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어딘가 빈약하고 단순한 표지판이자 텅 비었을 뿐인 허공마저 갈라놓은 스카이라인 속의 한 존재에 불과했다. 이 빌딩을 올려다보자면 허리를 뒤로 꺾게 된다. 그런 자세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느라 나는 헛손질을 했다. 그렇게 사진을 찍는 동안 서류 가방을 동판 위에 세워두었더니, 어디선가 경비원이 나타나 그 가방을 치우라고 요구했다.

그 경비원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나는 얼른 사과를 하고 몇 발짝 물러서서 내 서류 가방을 회색 포석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다가 내가 서 있던 자리 앞의 패널에 쓰인 여러 이름 중에서 로버트 콜이라는 이름을 보게 되었다. 콜은 아내와 어린 자녀 둘을 데리고 우리 동네에 살던 사람으로, 테러 사건 당시 사우스 타워 84층에서 일하고 있었다. 9·11 테러 사건으로 서른다섯의 나이에 바로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콜의 가족과 목례를 주고받는 정도의 안면만 있을 뿐 그다지 깊은 친분은 없었다. 9·11 사건이 있고 얼마 후 미망인과 아이들은 이사를 갔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특히 뉴욕 시티에서는.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우산을 쓴 사람, 유모차를 밀고 가는 사람, 지팡이를 짚고 절룩이며 가는 사람,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우물거리는 사람 등 지구상 어딘가 구석구석에서 온 수백 명의 사람이 한두 시간 전부터 여기 모여 있었다. 지난번에 여기 왔을 때는 개관식 몇 주 후였는데, 이 빌딩을 설계한 젊은 건축가 마이클 아라드가 말하기를, ‘도시의 공원’처럼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말하자면 추모의 장소라기보다는 공동체 전체를 위한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이 이곳의 일부가 된다면 정말 대단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한 번 여기 오기 시작하면, 이곳은 다시 생기 넘치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옳은 말이다. 지독하게 상처를 받은 엄숙함에도 불구하고, 트윈 타워가 서 있었고, 무너졌던 그 자리로 아치를 그리며 흘러내리는 물줄기의 조용한 속삭임, 동판에 새겨진 이름으로 남은 희생자 3000여 명의 고통, 새로 들어선 타워, 저 위에서 흐느끼며 굽어보는 어두운 하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맥박은 다시 뛰고 있다. 그 오랜 세월이 흐른 뒤—소인배 정치가들의 입에 발린 거짓말과 묻혀버린 꿈과 낭비된 돈이 함께 흘러간 세월—뉴욕 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작은 세계가 되었고 전보다 훨씬 더 쉬운 타깃이 되었다. 여기, 바로 이곳까지도.

2005년 6월, 내가 처음 그라운드 제로를 찾았을 때는 도로면에서 21미터나 파 내려간 지하의 바닥에 슬래브로 기초공사를 한 시점이었다. 파태키가 한 공사였다. 당시 주지사였던 파태키는 자신이 임명한 전문가들의 제안을 무시하고, 약 6만5000제곱미터의 대지 중에서 최악의 자리에 프리덤 타워를 건설하겠다는 ‘마스터플랜’을 선택했다. 거기에다가 그 자리는 허드슨 강에서 불과 몇십 미터 떨어진 위치였다. 과거의 트레이드센터가 쌍둥이 빌딩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암반에 닿기 위해 21미터나 파 내려간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강물이 흘러드는 것을 막아 습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거대한 콘크리트 욕조를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항만국 허드슨 강 횡단 통근열차(Port Authority Trans-Hudson commuter railroad; PATH)가 연중무휴로 하루 24시간 그라운드 제로를 관통한다.

4층 이상의 건물은 지어본 적이 없는 건축가가 설계한 뉴욕 주지사 파태키의 마스

[박스] 그라운드 제로의 재건축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석구석 볼썽사나운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건물을 지을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원론적인 문제에서부터 메모리얼 플라자의 형태나 주변의 조경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공개 재판에서 판결을 통해, 그것도 뉴욕에서 시끄러운 논란을 일으키면서 결정되었다. 이 도시가 자석처럼 세계 곳곳의, 전 세계 테러리스트들의 이목을 끈다는 사실—누구에게나 개방적이고 호의적이라는 특징, 그리고 미래의 공격에 대한 취약성—에 대해서만은 예외적이었다. 물론 세계적인 랜드마크가 된 이곳을 보호하고자 하는 노력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 대한 모든 사항은 비밀리에 논의되었다. 그리고 그 비밀 논의는 대니얼 리브스킨의 초기 설계(위. 2005년에 뉴욕 경찰청에 의해 무효화되었다)에서 안전조치가 훨씬 더 강화된 데이비드 차일즈의 설계로 총체적으로 재설계하고 위치를 바꾸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받은 인력으로 채운다는 것이었다. 뉴욕 경찰청은 월드트레이드센터의 보안을 위한 종합적인 계획도 수립했으며, 월드트레이드센터의 접근을 통제할 권리도 갖게 되었다. 항만 경찰은 프리덤 타워와 함께 완공이 몇 년이나 늦어지고 있는 PATH 역의 보안을 책임진다. PATH 역은 공사비가 애초 예산의 거의 두 배에 이르는 40억 달러에 달하고, 2015년이나 2016년쯤에 개관하게 된다.

두 기관 사이의 협약을 마무리 짓는 데에는 몇 개월이 걸렸고, 그러는 동안 그라운드 제로의 봉쇄를 푸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동안 그라운드 제로는 그 장소와 뉴욕 시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건물의 재건축이 미뤄지고 있었다. 바티칸 시티처럼, 그라운드 제로는 뉴욕 시와는 전적으로 별개이면서 동시에 뉴욕의 순수하고도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이들의 협약은 항만국 이사회의 승인을 거쳐 2008년 7월에 발표되었고, 그다음 달에 서명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약 4년 후, 뉴저지 주의 저돌적인 주지사 크리스 크리스티가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항만 경찰 외에 어떤 조직도 새로 지어질 월드트레이드센터의 보안을 책임지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공언한 것은 적잖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크리스티가 두 번째 임기를 위해 선거운동을 할 때, 항만 경찰 노조가 공식적으로 크리스 크리스티 후보를 지지한다는 것을 선언하는 행사에서 항만 경찰을 상대로 강연하는 도중에 했던 말이라는 사실에는 놀랄 것도 없다.

그곳은 뉴욕 시가 아니라 뉴저지 주였으니까.

자연은 진공 상태를 기피한다. 정치가들은 진공 상태를 좋아한다. 크리스 크리스티는 암호가 든 구겨진 양복을 입은 남자, 존 크로진을 밀어내고 뉴저지 주지사가 되었다. 크리스티와 2인조 팀을 이루어 항만국의 재무장을 추진한 뉴욕 주지사 앤드루 쿠오모는 데이비드 패터슨의 뒤를 이어 주지사 자리에 올랐다. 패터슨은 전임 주지사 엘리엇 스피처 아래서 존재감 없는 부지사였지만, 스피처가 과도한 여색 때문에 올버니로 도주하자 주지사가 되었다.

쿠오모와 크리스티 같은 사람—언제나 시선은 그다음에 쟁취할 것을 향해 있는 비이성적인 야망으로 가득 찬 정치가—들에게 그라운드 제로를 포함해 항만국은 분명한 목표, 즉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이 점은 전임 뉴욕 주지사인 조지 파태키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넉살이라도 좋았다. 쿠오모와 크리스티는 훨씬 더 계산적이고, 둘 다 자신의 비열함을 덮어두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쿠오모는 9·11 테러 사건 때 파태키를 향해 루돌프 줄리아니의 바짓가랑이만 붙들고 뒤에 숨어 있다며 그의 리더십을 조롱함으로써 2002년 선거에서 주지사가 될 기회를 날려버렸다. 크리스티는 그만큼도 못 되는 인물이었다. 언젠가 어느 타운홀 미팅에서 한 고등학생이 주지사가 왜 자기 자녀들은 사립학교를 보내느냐고 질문하자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그 학생을 꾸짖고 나무라는 데 희열을 느끼는 듯한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항만국이 뉴욕 주지사와 뉴저지 주지사에게 각각 여섯 명의 항만국 이사 임명을 요청하는 것은 전통적인 관행이다. 또 뉴저지 주지사가 이사회 의장을 임명하고, 뉴욕 주지사는 상임 이사를 임명한다. 이렇게 임명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거의 언제나 이쪽 주지사나 저쪽 주지사와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이사회와 회의록은 공개하지만, 투표는 사전에 논의하고 미리 각본을 짠 것이 분명해 보이고, 또한 항상 만장일치다. 이런 시스템은 정치가들과 항만국 이사진, 그리고 그라운드 제로의 하청 업자들에게는 서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를 형성하기 딱 알맞다. 얼마 전에 월드트레이드센터 재개발 소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된 뉴저지의 한 이사는 공교롭게도 엔지니어링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 회사는 또 공교롭게도 그라운드 제로의 하청 업체 중 한 곳에 매각 협상이 진행 중이다. 이사회에서 이 하청 업체에게 수억 달러짜리 일을 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앞에서 말한 뉴저지 출신 이사가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위의 하청 업체와 계약을 승인할 때 투표에 빠지곤 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삼척동자의 눈에도 뻔히 보이는 이해의 상충이기 때문이다.

또한 항만국이 세계 역사상 가장 돈이 많이 드는 기차역의 건설을 느릿느릿—느려도 너무 느리게— 진행하고 있는 이유 또한 설명된다. 하루 5만 명의 승객이 이용할 기차역이지만, 그 건설 비용은 일일 승객 60만 명인 맨해튼의 펜 역은 물론이고 일일 승객 75만 명인 그랜드 센트럴 역마저 무색케 한다. 새로 짓는 PATH 역은 단순한 기차역이 아니다. PATH 역은 뉴저지 주에 헌정되는 것이다. 그곳에서 사업을 진행하는 대가로 현금이 담긴 봉투째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아무나 주지사에 도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친구의 친구가 큰 떡고물을 만질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뉴저지 주지사 크리스 크리스티와 뉴욕 주지사 앤드루 쿠오모는 친구 이상의 관계다. 그들은 이권이 개입된 사업의 파트너인데, 그라운드 제로에서 두 가지 장애물과 마주쳤다. 뉴욕 시장 마이크 블룸버그와 항만국의 상임이사 크리스 워드였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2008년에 트레이드센터 보안 협약을 성사시킨 장본인이었다.

이 외에도 블룸버그가 지은 죄는 수도 없이 많다. 그의 뉴욕 경찰청은 뉴저지의 친구들을 감시했다. 그는 메모리얼 플라자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가장 돈이 많이 드는 부분이었던 9·11 박물관을 계획하고 있었다. 메모리얼 플라자의 개관식이 열렸던 2011년 9월 11일, 그는 기념식을 거행하면서 정치가들이 나와서 연설할 기회를 봉쇄해버렸다. 최악이었던 것은, 블룸버그가 이겼다는 것, 그리고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부채로부터 자유로운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돈으로 자신의 직위를 산 것이나 다름없는 억만장자다. 특히 세 번째 임기는 합법적이지 못한 임기였고, 그는 자신이

[풀쿼트] 레이 켈리와 크리스 워드의 주도로 진행되고 두 사람의 서명으로 완성되었던, 2008년에 항만국과 뉴욕 경찰청 사이에서 맺어졌던 보안 협약은 파태키가 놓은 주춧돌에 둘러싸인 채 물고기들과 잠을 자고 있다.

터플랜은 이랬다. 프리덤 타워를 허드슨강과 더 가까울 뿐만 아니라 열차 선로가 모이는 자리, 그것도 6차선 고속도로인 웨스트 스트리트에서 겨우 7.5미터 떨어진 곳에 세우고자 했다. 엔지니어들에게는 더 큰 과제를 안겨주는 마스터플랜이었다. 기초공사를 수정하고 90센티미터 더 두껍게 보강해야 했고, 열차의 운행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새 타워가 들어설 자리의 기초공사를 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터 잡기를 준비하는 데에만 9개월이 걸렸다. 한편, 2004년 7월 4일, 공화당의 전당대회가 열리기 일주일 전, 주지사 파태키는 그라운드 제로에서 기념식을 거행했다. 상투적인 인사말과 그곳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21톤 무게의 화강암 초석을 놓는 행사였다.

“오늘, 우리는 이 도시와 이 나라의 몇 가지 상징이자 테러에 맞서 승리하겠다는 굳은 결의의 표현이 될 초석을 놓습니다. 오늘, 우리는 프리덤 타워를 세우는 것입니다.” 파태키 주지사는 그렇게 말했다. 테러리스트들에게 두 번이나 대규모 공격을 당했던 건물이 있었던 자리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자리에 미국의 굳은 결의와 승리를 상징하는 새로운 기념비적인 건물을 짓겠다는 계획이 얼마나 무모한 생각인지를 아무도 감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의아스럽다 못해 걱정스럽기까지 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뉴욕 경찰청은 처음부터 그것을 감지하고 2004년 8월에 항만국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항만국에 보낸 편지에서, 당시 뉴욕 경찰청의 대테러 담당 부청장은 프리덤 타워를 웨스트 스트리트에 근접해 건축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를 열거하고 이 문제를 함께 논의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항만국은, 9·11 사건으로 전무이사와 37명의 항만국 경찰을 포함, 80명에 달하는 직원이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뉴욕 경찰청의 제안을 묵살했다. 2005년 언론에서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자 항만국 대변인은 뉴욕 경찰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그런 제안을 받은 적이 없거나 받았다고 해도 남아 있는 공문이 없다고 발뺌했다.

이 일은 소소한 관료주의적 말장난이 아니었다. 항만국 그리고 주지사 파태키가 뉴욕 시를 향해 그냥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우리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이 약 6만5000제곱미터의 땅을 너희들한테 못 넘겨준다, 이것이 바로 뉴욕 경찰청의 핵심이었다. 벽창호 같은 항만국과 상대하다 지친 뉴욕 경찰청은 토지 소유권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컨설턴트들과 함께 월드트레이드센터의 임차인인 부동산 개발업자들을 만났다. 이들은 향후 10년 이내에 월드트레이드센터를 겨냥한 테러 행위가 재발할 것이 확실하다는 의견에 동조했다.

주지사 조지 파태키는 승리를 재천명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프리덤 타워는 애초에 계획했던 것처럼 안전하게 지어질 수 없을지도 몰랐다. 설계를 다시 한다면, 재건에 소요되는 기간도 수십 개월이 더 걸릴 것이고 비용은 수백만 달러가 더 들 것이었다. 항만국의 무능과 부정직함에 대한 비난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사람에게 당혹감을 안겨줄 것이었다. 파태키는 2005년 5월 4일 ‘미국의 정신을 다시 한 번 고양시키고 자유에 공헌한다는 목적에 부합하는 또 하나의 웅장한 설계도’를 기대한다고 발표했다.

2006년 6월 어느 끈적끈적한 금요일 아침, 나는 크레인 기사가 대형 트럭에 초석을 싣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인부들이 싸구려 방수포를 덮자, 트럭에 실린 초석은 그라운드 제로를 떠났다. 영원히. 환송식이나 고별식도 없었고, 카메라도 없었고, 항만국은 보도 자료조차 내지 않았다. 조지 파태키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뉴욕 경찰청의 제안에 따라 지어지는 프리덤 타워는 웨스트 스트리트에서 30미터 떨어져 있고, 기초공사를 보강하기 위해 사용된 콘크리트는 그 어떤 콘크리트보다도 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월드트레이드센터를 보호하는 데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부분은 공학이나 건축과는 거의 상관없는 부분이다. 1993년의 트럭 폭탄은 노스 타워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항공사들이 항공기 납치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1970년대에 보안 전문가들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여 조종실 출입문의 잠금장치에 더 투자했더라면 9·11 테러라는 비극의 시나리오는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의 공격으로부터 그라운드 제로를 방어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앞으로의 위협이 무엇일지는 추측이나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만나본 테러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한 가지는, 그라운드 제로는 또다시 타깃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피터 버겐은 2008년에 이렇게 말했다. “이미 두 번이나 공격의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그라운드 제로는 영원한 타깃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또 일을 벌일 것입니다. 그저 알 카에다를 추종하는 자들의 어이없는 시도일지라도 말이죠.”

버겐은 CNN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국가 안보 분석 전문가지만, 뉴욕 대학의 법률·보안센터와 하버드 대학의 케네디 행정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라운드 제로에 새 건물을 짓는 일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때 앞으로 그라운드 제로는 확실히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나라면 거기서 일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건 제 사적인 의견일 뿐입니다.”

정말 사적인 의견일 뿐이다. 프리덤 타워의 북쪽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7월드트레이드센터라고 알려진 건물이 있다. 52층짜리 업무용 건물로 프리덤 타워를 설계했던 건축가 데이비드 차일즈가 설계했는데 연면적이 약 15만8000제곱미터에 달한다. 2006년 5월에 개관했으며, 버겐의 의견과는 전혀 의견이 다르거나 두려움 없는 인생을 사는 듯이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게 바로 뉴욕 시티다. 새벽부

[풀쿼트] 과거의 공격으로부터 그라운드 제로를 방어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앞으로의 위협이 무엇일지는 추측이나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만나본 테러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한 가지는, 그라운드 제로는 또다시 타깃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터 이튿날 새벽까지 자신의 운을 계산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택시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 국도로 들어갈까? 고속도로를 탈까? 그리고 건물에서 나와 인도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경계를 한다. 사람들은 지금도 수중에 돈 한 푼 없이, 영어 한마디 할 줄 모르면서도 이곳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이곳에 도착한다. 그라운드 제로를 취재하고 심사숙고하며 보낸 8년의 세월도 나에게 지혜라 부를 만한 것을 가르쳐주지 못했다. 한 가지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다면, 9·11 테러에 대한 미국의 대응 자체가 재앙이었다는 사실이다.

공포심과 충성심을 맞바꾼 정치가들이 9·11 테러를 얼마나 유익하게 써먹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라. 이런 정치가들이 연방정부 차원에서 갖게 된 힘은 점점 더 커져서 고문을 용인하고 기한 없는 구금을 가능케 하고 법원에서의 비밀스러운 거래를 통해 대규모의 시민을 감시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무고한 희생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인정찰기에 의한 죽음을 불러올 수도 있는 프로그램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월드트레이드센터에 대한 테러가 알 카에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사실마저 무시하고 다른 음모 이론을 내세우려는 의도는 아니다. 블랙 헬리콥터나 할리우드의 판타지를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공격에 대한 우리들 자신의 반응으로부터 파생된 손실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이러한 반응과 그로 인한 손실은 지구상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일어난 적이 없고 일어나고 있지도 않다. 미국을 예외적인 나라로 규정해준다고 생각해온 가치와 원칙을 저버리는 것은 스스로의 자유를 신봉하는 나라로서 적합한 대응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진실을 대면할 용기가 없을 정도로 분열된 나라의 비겁한 행동일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나약했다. 우리 모두가, 개인으로서든 집단으로서든, 나약했다.

나약함을 인정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용기가 필요하다. 월드트레이드센터의 재건축이 이미 보여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미 그곳을 가득 채운, 사소한 일로 북새통을 떠는 대신 삶과 자유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이미 그것을 보여준 것이다. 간단히 말해,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준 것이다.

결론은 단순하고 담백하다. 그라운드 제로의 안전은 일차적으로 예방과 대응의 전략을 수립하고 일상적으로 실행할 책임을 가진 기관의 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전략은 로켓 과학도 아니고 정밀한 뇌수술도 아니다. 그러나 월드트레이드센터에서 안전 전략은 그 두 가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9·11 이후 항만국과 뉴욕 경찰청의 불협화음을 돌이켜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또한 그라운드 제로를 보호하기 위한 의사 결정에 참여해왔으며 앞으로도 참여할 것으로 보이는 정치가들의 역할 또한 다시 한 번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부터 출발해보자. 2008년 항만국과 뉴욕 시는 그라운드 제로의 일차적인 보안 책임과 권한을 그동안의 담당 기관이었던 항만 경찰로부터 뉴욕 경찰청에 넘긴다는 합의에 도달했다. 이 합의는 뉴욕에 익숙한 모든 이들에게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공격에 대한 우리들 자신의 반응으로부터 파생된 손실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이러한 반응과 그로 인한 손실은 지구상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일어난 적이 없고 일어나고 있지도 않다. 미국을 예외적인 나라로 규정해준다고 생각해온 가치와 원칙을 저버리는 것은 스스로의 자유를 신봉하는 나라로서 적합한 대응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조건에 대한 진실을 대면할 용기가 없을 정도로 분열된 나라의 비겁한 행동일 뿐이다. 우리는 나약했다. 우리 모두가, 개인으로서든 집단으로서든, 나약했다.

항만 경찰은 미국의 경찰 조직 중 41번째로 큰 거대한 조직이고, 여기에 소속된 1700명의 경찰은 뉴욕 경찰청 소속 경찰보다 근무 시간은 더 짧으면서 연봉은 훨씬 많이 받는다. 항만 경찰은 공항, 버스 터미널, 교량, 항구 등의 치안을 담당해왔으며, 수십 년 동안 이들이 쌓은 평판은 좋게 말해서 ‘수준 이하’라고 할 수 있었다. 공화당 소속의 한 뉴욕 시장 후보는 지난 5월에 그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항만 경찰을 비난했다. 그는 항만 경찰이 담당하는 공항의 치안에 대한 질문을 받자, “쇼핑몰의 경비원들보다도 못하다”고 직격탄을 날렸고, 그러자 수많은 정치가는 곧바로 그를 비난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들은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9·11 테러 사건 때 37명의 항만 경찰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의 쇼핑몰 경비원들이 명예훼손으로 그를 고소할 수 있을 만큼의 조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의견도 분분했다.

뉴욕 경찰청의 인력은 FBI보다도 많은 5만 명에 달하며, 그중 3만4000명은 정복 경관이다. 이들은 전 세계를 무대로 거침없는 대테러 대책과 작전을 구사하며, 독일, 프랑스, 이스라엘에 자체 인력을 파견해두고 있다. 뉴욕 경찰청장인 레이 켈리는 〈60분〉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뉴욕 경찰은 필요할 경우 공중에서 항공기를 요격할 수도 있다고 발언했고, 그의 발언에 대한 질문을 받은 마이크 블룸버그 뉴욕 시장은 뉴욕 경찰청이 “여러분들은 무엇인지, 어느 정도인지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답변했다.

대테러 활동의 이러한 수단—이슬람교를 믿는다는 것 외에는 어떠한 죄도 물을 수 없는 시민들을 감시함으로써 이미 직권을 남용하고 있는 정보 조직을 가진 도시의 군대—은 자유와 안보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잡아야 하는가, 경찰력으로 위장한 군사력을 시민의 힘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중대하고도 시급한 의문을 갖게 한다. 우리가 그라운드 제로의 작은 업무 공간 속에 앉아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는 이 시간에도,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한 문제에 비하면 앞서 제기한 의문은 그저 빛이 바랄 뿐이다. 바로 우리의 안전을 지키는 일은 누가 더 잘해낼 수 있을 것이냐 하는 문제다.

2008년 뉴욕 시와 항만국 사이에서 이루어진 보안 협약이 이 질문에 답을 제시했다. 뉴욕 경찰청은 600명의 경찰청 인력으로 월드트레이드센터 관할구—뉴욕 경찰청 산하에서 가장 규모가 큰 관할구가 된다—를 창설하되, 그 인력은 모두 대테러 교육을

두려워하거나 떠받들어야 할 필요가 없는 정치가들을 환대하지 않았다.

블룸버그는 임기 제한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잊힐 운명이었지만, 뉴저지와 뉴욕의 주지사 크리스티와 쿠오모—분노를 참을 길 없었던 두 남자—에게 중요했던 것은 기요틴에 바쳐질 목이었다. 항만국을 방패 삼고 비용까지 교묘히 떠넘긴 채, 그들은 2012년 9월 11일에 개관할 예정이었던 박물관의 건축 작업을 없던 일로 만들어버렸다. 만약 블룸버그가 계속 시장 직에 있었다면, 그는 그 박물관의 개관을 자신의 치적으로 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박물관은 블룸버그의 임기가 끝난 후인 2014년에나 개관할 예정이다. 쿠오모와 크리스티가 9·11 희생자들과 미국의 핵심적인 가치를 기리는 애틋한 연설을 하면서 박물관의 개관식을 진행하는 영광을 누릴 것은 자명하다.

지금 당장, 바로 이곳에서 우리는 메모리얼 파크 입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수백 명의 새로운 순례자들을 만난다. 우리는 공공도로인 뉴욕 시티의 거리에 있고, 혹시 누군가가 소총과 폭탄을 사서 또 한 번의 사냥을 위해 그라운드로 제로로 달려가지 않는지 감시하는 수많은 눈들도 있다. 뉴욕 경찰청이 바로 지금 이곳에 200명 이상의 인력을 동원해 하루 24시간 빈틈없이 사방을 감시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크리스 워드가 항만국의 상임이사로 있을 때 한 일들은 다양하다. 그는 인맥을 따라 이권에 개입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항만국와 시청, 그리고 건설업계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인물이다. 또 하버드 대학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는 생각과 주장이 분명한 사람이다. 실용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이상을 품고 있지만, 정치적인 야망은 없다. 크리스티와 쿠오모가 그를 싫어한 것은 당연했다.

워드는 2008년 엘리엇 스피처가 사임한 뒤, 데이비드 패터슨에 의해 임명되었다. 당시 재건축은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예산과 완공 예정일에 대해, 그리고 월드트레이드센터에서 진행되는 공사와 그 공사가 아주 오래전부터 현금과 정치 자금을 끊임없이 짜내고 있는 캐시 카우의 차이에 대해 말했다.

데이비드 패터슨은 정치적인 미래도 없었지만 그라운드 제로의 유산에 대한 걱정도 없었기 때문에 워드가 CEO로서 상황을 주도할—공사 계획에 필요한 협약을 맺고, 월드트레이드센터의 재건축을 시행할— 권한을 주었다. 워드는 프리덤 타워의 입주 예정자들과 협상을 했고, PATH 역 건축가에게는 비용을 줄일 것을 주문했으며 지역 단체장들의 회의와 노조 시위 장소에 나타나 항만국의 결정 사항을 설명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항만국이 9·11 사건 10주기까지는 메모리얼 플라자를 완공하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실현될 즈음 그는 이미 상임 이사로서는 죽은 목숨이었고, 그 사실을 본인도 알고 있었다. 블룸버그는 뉴욕 주지사 쿠오모에게 항만국 상임이사인 워드를 그 자리에 그대로 둘 것을 직접 요청했지만, 그것은 사실 죽음의 키스였다. 2011년 쿠모오는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워드는 물론 주지사와의 연결도 끊어버렸다. 회의도, 전화 통화도, 이메일도, 신문지에 싸서 삼줄로 묶은 죽은 고등어도 차단했다. 대화를 위한 워드의 어떠한 접촉에도 대응하지 않았다. 워드를 냉대하고 따돌리는 상황에 대해 기자들이 질문하자, 쿠오모 측 인사들은 주지사가 ‘당분간’ 워드와 상대하지 않기로 했을 뿐이라고 일축했다. 9·11 사건 10주기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리스 워드는 사임을 발표했다.

뉴저지의 크리스티 주지사와 뉴욕의 쿠오모 주지사가 200만 달러 이상의 비용을 들여 항만국의 회계 감사를 지시한 지 일주일 후였다. 지난 6월 항만국은 다시 회계감사를 명령했다. 앞선 회계감사를 수행하도록 항만국으로부터 의뢰받은 컨설팅 회사의 청구 절차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레이 켈리와 크리스 워드의 주도로 진행되고 두 사람의 서명으로 완성되었던, 항만국과 뉴욕 경찰청 사이에서 2008년에 맺어졌던 보안 협약은 전임 뉴욕 주지사인 파태키가 놓은 주춧돌에 둘러싸인 채 물고기들과 잠을 자고 있다.

앞으로 50년, 100년이 지나면 누가 알까? 옛날 월드트레이드센터는 1966년에 기공식을 했지만, 건물의 수명은 40년을 넘기지 못했다. 나는 이 장소를 사랑하게 되었고, 이 장소가 주는 역겨운 느낌까지도 사랑하게 되었다. 그 모든 것—정치적 암투, 인권 다툼, 명예의 악용과 진실의 배반—이 없었다면, 내가 여기서 무엇을 느끼게 되었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미국의 한 형태인 뉴욕 시티를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바로 지금도 모든 희망과 조화, 뜨거운 크니시(감자·쇠고기 등을 밀가루 반죽피로 싸서 튀기거나 구운 것)가 여전히 제몫을 하는 곳, 피부색도 전통도 다른 여러 인종이 모여드는 곳. 공교롭게도 지금의 이곳은 우리가 진정으로 가진 유일한 시간이자 장소다.

지금 당장, 바로 이곳에서 우리는 메모리얼 파크 입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수백 명의 새로운 순례자들을 만난다. 우리는 공공도로인 뉴욕 시티의 거리에 있고, 혹시 누군가가 소총과 폭탄을 사서 또 한 번의 사냥을 위해 그라운드로 제로로 달려가지 않는지 감시하는 수많은 눈들도 있다. 뉴욕 경찰청이 바로 지금 이곳에 200명 이상의 인력을 동원해 하루 24시간 빈틈없이 사방을 감시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마이크 블룸버그가 뉴욕 시장 직에서 물러나면 어떻게 될지, 레이 킬러가 그 뒤를 따르면 어떻게 될지는 누구나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라운드 제로의 공식적인 관할권을 두고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서 누가 승리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실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약물 스캔들과 엘리엇 스피처-앤서니 와이너 2인조가 차기 주지사직을 위해 다시 뛴다는 소문에도 사람들은 사실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뉴욕에서도 마찬가지다. 뉴욕 시는 잠든 적이 없으며 심각한 주의력 결핍 장애를 앓은 적도 없다.

그렇다면, 어디가 더 나은 곳인가? 비에 쓸려 나가고 역사에 유린당한 메모리얼 플라자. 소동은 끊임없고 주사위는 그침 없이 구르는 도시. 미국에서는 반은 멋 부린 저능아, 반은 야바위꾼인 사람들이 테이블 주위에 모여 돈을 건다. 올인. 여기 이 아래서 우리는 셔터를 눌러댄다. 모든 이는 초대받아 온 사람이다. 패배자는 두려울 것도 잃을 것도 없다고 믿는 바보들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