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도 흑인도 아니기 때문에 절대로 넘지 못할 재즈의 벽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극복한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 그녀의 새 앨범 <Voyage>를 통해 한국적인 재즈로 유럽을 사로잡은 그녀의 재즈 여행 이야기를 들어본다.
Numéro, 2008년 11월
에디터│최태형 메이크업 | 이난희 Photographed by Kim Bumryul
[Numéro] 앨범의 제목이 ‘Voyage’네요. 여행을 좋아하세요?
[나윤선] 특별히 ‘여행’이라는 목적으로 다닌 적은 없어요. 낯을 많이 가리기도 하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직업이 가수다 보니 어쩔 수 없게 된 거죠. 어려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삶이에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운명인 것 같아요. 누군가 저에게 스튜어디스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참 많이 돌아다닐 사람이라고요. 그때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됐네요.
함께 공연하는 뮤지션이 많은 것만 봐도 매우 활발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음악을 하시지만 제가 누구 앞에서 노래를 한다거나 공연을 한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졸업하고 취업하고 그러다 일이 저랑 맞지 않아 잠시 쉬는데, 친구의 권유로 뮤지컬을 하게 된 거죠. 그때가 20대 중반이었어요. 전혀 계획 없이 진행됐어요. 배에 올라 방향키를 잡지 않고 그저 바람에 따라 이 길로 오게 된 거죠. 그런데 참 행복해서 다행이에요. 저는 모르겠지만 제 안에 활동적인 기운이 있나 봐요. 덕분에 이렇게 살고 있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됐고요.
이번 앨범에 함께한 울프 바케니우스와는 어떻게 만난 건가요?
지난 앨범 <Memory Rane>을 함께 작업한 덴마크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닐스 란 도키(Niels Lan Doky)가 보사노바를 주제로 공연 프로젝트를 기획한 적이 있어요. 그때 유럽의 뮤지션들과 함께 저를 초대했는데, 그곳에서 울프 바케니우스를 만났어요. 그때는 단 두 번의 공연뿐이었는데 언제 한번 의기투합하자고 약속했었죠. 그러다가 작년 두산 아트홀 개관 기념 공연 제의를 받고 그와 듀엣을 하게 된 거예요. 그때 울프 바케니우스가 참 좋아했어요. 그래서 음반도 함께하게 됐고, 3주에 걸친 한국 투어도 함께 잘 마무리했어요.
지난 앨범 <Memory Rane>은 팝 성향이 강하게 느껴졌어요. 김광민, 하림 등 대중적인 뮤지션의 참여도 그렇고요.
제가 음악을 시작한 나이가 빠르지 않잖아요. 스물일곱 살이었으니까요. 모르는 게 많아서 이것도 해야 될 것 같고 저것도 해야 될 것 같고, 또 이것도 저것도 다 하고 싶었죠. 그래서 다양하게 접근했어요. 또 항상 한국의 좋은 뮤지션을 유럽에 소개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한국 작곡가의 곡을 유럽의 뮤지션이 연주하면 어떨까?’ 했는데, 닐스 란 도키를 만나 그게 실현됐어요. “이게 정말 한국 작곡가의 곡이야?” 할 정도로 좋은 반응이었고, 저 스스로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었죠.
이번 앨범은 조금 틀려요. 보컬이 도드라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지금까지는 그룹으로 음악을 했어요. 퀸텟도 그렇고요. 곡을 쓸 때도 ‘이 소리와 저 소리가 부딪치면 어떨까?’ 등 항상 여러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만 했죠. 이번에는 뭔가 좀 다르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듀엣으로만 하려고 했죠. 상황이 여의치 않아 다른 뮤지션들과 함께하게 되고 조금 다른 프로젝트가 됐지만, 기본적으로 소편성에 여백이 많은 음악을 만들려고 했어요. 구성이 단순해지다 보니 각 파트별로 더 잘 들리게 된 거죠.
보컬의 입장에서 퀸텟과 듀엣은 어떻게 다른가요?
재즈는 정말 다양한 편성이 가능해요. 한 번의 합주도 없이 여럿이 함께 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매 공연이 모두 다른 느낌이지만 둘의 무대 위에서의 느낌을 말하자면, 예를 들어 단둘이 말할 때는 서로 이심전심으로 통하잖아요. 좀 더 깊고 진지하게 대화할 수 있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 느낌이 전달되고요. 그렇게 바로바로 전달되는 느낌이 있어요. 기분이 좋죠. 반대로 다섯 명이 한 공간에서 이야기를 할 때는 서로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을 순 없지만, 여기저기서 다양하고 활발한 대화가 오가요. 그리고 어느 순간 모두가 동시에 통해서 미친 듯이 웃었을 때와 같은 바로 그런 쾌감이 있어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뜻이 없는 노래를 부르는 스켓을 할 때는 어때요?
스켓도 마음대로 하는 것은 아니에요. 공부를 하고 길을 따라가야 하는 거죠. 하지만 그걸 지키면 굉장한 자유를 느낄 수 있어요. 가사로 전달하는 게 아니라 울림으로만 전달하는 거예요. 멜로디 위에 있는 보컬이 아니라 멜로디 속에 존재하죠. 내가 만들어낸 음과 다른 뮤지션이 만들어낸 음이 하나로 만나 교감할 때의 쾌감! 재즈의 즉흥 연주가 다 그렇죠.
즉흥적이라는 게 재즈의 매력이에요.
지금껏 함께한 뮤지션을 생각해보면 이게 바로 지구 한 바퀴를 다 도는 세계 여행이에요. 똑같은 곡을 가지고도 브라질 뮤지션과 함께할 때에는 브라질만의 소리가 섞여요. 알제리 뮤지션과의 공연에서는 또 중동만의 느낌이 소리에서 전달되죠. 그럼 전 브라질로, 알제리로 여행을 떠나는 거예요. 노래를 부르면서 그곳에 있는 느낌인 거죠. 미국도, 유럽도 그들과 함께 공연하면 다 느낄 수 있어요.
그런 점이 때론 재즈를 방탕한 음악 혹은 어려운 음악이라고 느끼게 해요.
재즈의 이미지는 담배 연기 가득한 공간에 빌리 홀리데이의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목소리, 약에 취한 분위기 등 뭐 이런 느낌이에요. 물론 아주 멋진 시기이고 지금의 재즈가 있게 한 사람들이지만 그게 다가 아니죠. 또 보이는 것 외에 힘든 노력을 했던 사람들이에요. 재즈는 록보다는 클래식 같은 음악이에요. 공부해야만 따라갈 수 있는 음악이죠. 그런데 듣는 사람들은 그럴 필요 없어요. 음악은 습관이에요. 자주 들으면 돼요. 한 곡에 10분씩 되는 어려운 재즈 말고 듣기 편한 재즈부터요. 편하게 받아들이면 돼요. 꼭 들어야 하는 음악인 것도 아니잖아요. 미리 겁먹을 필요 없어요.
독일의 재즈 레이블 ACT와 정식 계약을 맺고 내년 2월에는 음반이 세계 38개국에 선보인다고 들었어요. 새로운 계획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건 별로 없어요. 제가 계획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흘러가는 거죠. 잘되면 좋고 안 돼도 슬퍼하지 않아요. 전 그냥 공연하고 공부하고 계속해오던 일들을 하겠죠. 그런데 이번 계약으로 제가 북유럽에 가게 됐어요. 바이킹이 살던 곳이죠. 흥미로운 건 20년 전에 배낭여행을 하며 잠시 들렀던 곳인데, 지금 이렇게 일 때문에 다시 가게 됐다는 거예요. 20년 만에 다시 그곳에 가게 된다니, 뭔지 모를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는 느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