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quire Korea, 2014년 10월
글/최태형 사진/게티이미지
MBC 드라마 〈왔다! 장보리〉가 시청률 30퍼센트를 넘기며 ‘국민 드라마’ 타이틀을 넘보고 있다. 매회를 거듭할수록 〈왔다! 장보리〉는 한 신 한 신이 다 이슈가 된다. 그런데 가장 빈번하고 뜨거운 이슈를 만드는 인물은 주인공 장보리(오연서)가 아니다. 장보리의 곁에서 그녀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역할의 악녀 여민정(이유리)이다. 그녀는 극 중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연인과 부모, 아이까지 버릴 정도로 매정하고 반인륜적이다. 매회 비겁하고 비열한 악행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뻔뻔하고 가증스럽다. 그런데도 그녀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왔다! 장보리〉가 결말로 향해갈수록 더욱 도드라진다. 그녀는 극에서 없어선 안 될 인물이다. 스토리에 긴장을 불어넣고 극에 터닝 포인트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때론 억지 설정마저 감당하며 극의 갈등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여민정이 어떤 악행을 벌일지, 그녀의 끝이 어떻게 될지를 보기 위해 〈왔다! 장보리〉를 본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선이 얼마나 선한가를 보기 위해선 대조군이 필요하다. 명암이 짙을수록 밝은 면이 돋보이기 마련이다. 여민정이 얼마나 인상적이냐에 따라 장보리가 더욱 빛난다. 장보리를 불쌍히 보이게 하기 위해서, 장보리에게 시련을 이겨내게 하기 위해선 여민정이란 장치가 필요하다.
악녀는 얼마든지 극의 상황을 유동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한 장치다. 급격한 상황의 변화는 극의 긴장감을 만든다. 착한 역할이라면 억지 설정이 될 수 있는 전개도 악녀라면 괜찮다. ‘이런 억지가 어디 있냐’는 항의보다 ‘저런 나쁜 년’ 하며 극에 몰입하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악녀는 그래서 뭐든지 가능하게 하는 만능키 같은 존재다.
악녀가 주인공의 주변에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주인공이 악녀가 되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급격한 감정 변화로 선량한 사람의 무서운 면을 보여주는 것도 극의 몰입을 높이는 요소다.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 착한 사람이 타락하거나 독해지는 게 더욱 드라마틱하다. 그래서 한때는 톱스타로 가는 길목에 꼭 악녀 역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장희빈 역이 손꼽히는데, 계보가 있는 악역이었다. 1961년 영화 〈장희빈〉의 김지미를 시작으로 남정임, 윤여정, 이미숙, 전인화 등 장희빈 역할을 맡았던 배우들은 줄줄이 스타가 됐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김혜수, 김태희 등이 장희빈을 연기했다.
드라마 제작자와 스타가 되려는 배우들만 악녀를 사랑하는 건 아니다. 악녀에 몰입하는 대중들이 사실은 악녀를 가장 원하고 있다. 악녀는 대중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대중은 얼마든지 나쁜 년이라고 욕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는다. 나쁜 사람을 욕하면서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표독스럽고 가증스러운 여민정을 비난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다. 악녀는 또 대리만족을 주기도 한다. 미처 표출하지 못한 잠재된 악한 본성을 대신 분출하는 것이다. 현실에 있을 법한 못된 사람, 현실에서는 하지 못할 나쁜 일을 대신 경험하는 것이다. 누구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고 싶어 하지만 그렇지 못하기에 악녀에 빙의된다.
남자들이 악녀에게 끌리는 이유는 더욱 명백하다. 남자는 여자를 소유하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수동적인 여자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 남자가 원하는 여자는 ‘낮엔 신사임당 밤엔 요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악녀는 대부분 얻고자 하는 것이 명확하다. 그렇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자신의 매력을 알고 관능적으로 어필하는 것은 그래서 악녀의 기본이다. 가장 쉽게 얻고자 하는 걸 얻는 방법은 싸우지 않고도 받아내는 거니까. 이런 악녀의 매력은 남자를 끌어당긴다. 성적 매력을 자극하고 타락을 제안한다. 스릴과 아찔함은 남자를 끌어당기는 무기다. 남자의 정복 욕구를 자극하는 거다.
여성들에게 악녀란 남성주의 사회에서 억눌린 여성을 구하는 선각자 역할을 한다. 착하고 순종적이어야 한다고 교육받은 여성들이 동경하는 대상이라는 말이다. 아담이 이브를 만나기 전 결혼했던 릴리스를 악녀인 동시에 여성 운동가라 말한다. 릴리스는 관능적인 여자였다. 자위 행위를 하는 악녀, 금지된 쾌락을 좇는 적극적인 여자. 진정한 페미니즘의 실현은 악녀여야 가능하기도 하다.
〈청춘의 덫〉에서 여리기만 했던 서윤희(심은하)가 ‘다 부숴버릴 거야’라고 말했을 때 진한 쾌감을 잊지 못한다. 그때 서윤희는 남자에게는 쉽지 않은 여자로, 여자에게는 남편이나 사회로부터 완벽히 독립된 주체적 인간으로 매력을 풍겼다. 반전의 주인공으로 시청률을 높인 건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