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콰이어〉의 스무 살을 맞아 ‘진짜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풋풋하기보단 농염하고, 연약하기보단 강단 있는…. 신사의 한쪽 무릎을 꿇게 할 그런 여자 말이다.

Esquire Korea, 2015년 10월
Photographs by KIM YEONGJUN

여자에게 다짜고짜 만나달라고 조르는 게 신사답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다. 서로를 잘 아는 것도, 그렇다고 자주 마주치는 사이도 아니라면 더욱이 그렇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유명한 사람이라면 더욱 더 상대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란 것도 안다. 알지만 그랬다. 그녀에게 만나자는 말을 전해줄 사람을 수소문했고 급기야 전화번호를 눌러 통화를 시도한 것도 사실이다. 변명하자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꼭 그녀여야 해서였다. 〈에스콰이어〉 20주년을 기념하는 책, ‘우리가 사랑하는 여성(A Women We Love)’에 대한 기사를 위해서는 좀 더 특별한 여성을 만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화보를 통해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녀는 엄정화다.

엄정화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여성성이라는 정의를 새로 썼다. 그녀는 재충전이라는 명목으로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거나 장르를 가리며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영화와 TV를 오갔고 무대에선 춤과 노래로 항상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그녀는 현재까지도 전방위로 가장 앞장선 위치에 있다. 활동하는 내내 시간을 거스르지도, 그렇다고 순응하지도 않으며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었다. 엄정화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에스콰이어〉의 기념비적 이슈에 만날 여성으로 엄정화가 아닌 다른 사람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변명하자면 내겐 그녀에게 만나자고 할 최소한의 명분이 있었다. 상황 역시 당사자에게 직접 전화할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기도 했다. 소속사를 통할 수 없었던 이유부터 말하자면 그녀가 막 영화 〈미쓰 와이프〉의 활동을 끝내고 소속사와의 계약을 마무리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직접 연락할 최소한의 명분은 내게 엄정화의 전화번호를 알려준 당사자가 바로 엄정화 자신이었기 때문이다(물론 그게 벌써 8년 전 일이고, 마지막 연락을 주고받은 게 3년이 꽉 찼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한 패션 행사장에서 엄정화를 처음 만났다. 엄정화가 〈D.I.S.C.O〉 앨범 활동을 할 때였다. 뮤지션 정재형의 소개로 엄정화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 선뜻 그녀가 연락처를 알려줬고 인터뷰까지 한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때 연락처를 알려준 이유로 지금 다시 마주 앉게 됐다. 이번엔 아주 오랜만에.

“사실 너무 오랜만이라 답변을 못 받아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불쑥, 그것도 소속사도 통하지 않고 직접 연락했으니까요. 좀 미안한 생각도 들었어요.”

“아니에요, 뭐 어때요? 예전에 우리 인터뷰도 했잖아요. 그때도 재미있었어요.”

엄정화는 8년 전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만난 수많은 기자 중 한 명과의 매우 짧은 기억을 말이다. 사실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 직업에선 지나가는 인연은 빨리 잊는 게 자신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 기억하는 것만으로 곤란한 부탁을 받게 되거나 쉬운 거절이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곤란한 부탁? 안 할 거잖아요? 그리고 곤란한 부탁이면 거절하면 되죠 뭐.”

“다행이네요. 거절당하지 않아서.”

“사실 수락해놓고는 거절하고 싶었어요. 처음 말을 듣고는 20주년 기념호라는 게 의미 있을 것 같고, 오랜만에 직접 화보의 세세한 부분까지 이야기 나누다 보니까 재밌어서 덜컥 약속을 해버렸지만…. 생각해보니까 활동이 끝난 시기라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촬영에 임해도 될까 싶어서요.”

“그래서 걱정했어요. 돌연 잠적하면 어쩌나 하고요.”

“에이 그럴 리가요. 약속한 거잖아요. 세세한 부분을 직접 얘기 나누는 게 오랜만이라 덜컥 부담이 느껴지긴 했지만, 번복하는 건 약속을 깨는 거잖아요. 그럼 많은 사람이 곤란해지죠. 그런 일은 만들지 말아야죠.”

엄정화가 오래도록 최전방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화보를 위해 엄정화와 나눈 카카오톡 메시지만 해도 하루를 거르지 않고 이어졌다. 스태프 구성과 사진 톤, 의상 콘셉트에 대해 나눈 얘기가 스마트폰을 가득 채웠고, 촬영장의 거울 크기와 손톱 색까지 미리 이야기했다. 아마도 그녀가 덜컥 느껴졌다는 부담은 기자를 너무 괴롭힐까 미안해서 느낀 부담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제가 엄마 역할을 하거나 코믹한 아줌마로 나와서 환상을 깨고 현실과 맞닿아 있는 연기를 해도 이미지에 갇히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요.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이렇게 화보를 찍거나 가수 활동으로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가수를 할 때, 배우를 할 때 더 용감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언제든 무대 위에서 멋있을 수 있고 사진 속에서 새로울 수 있으니까요. 또 연기를 통해 다가갈 수 있기도 하고요.”

엄정화가 오랜 시간 동안 매번 새로우면서도 친근하고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잡을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섬세하게 챙기는 그녀의 변신. 시간이 흐르면서 주어지는 이미지가 아닌 스스로를 세심하게 컨트롤한 것이 엄정화를 여전히 최전선에 있게 했다. 날 선 배우로, 사람으로, 그리고 20주년을 맞은 〈에스콰이어가〉 꼭 만나고 싶어 한 여자로 말이다.

“누구나 스스로 느끼는 슬럼프는 있어요. 스스로를 믿어야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그 과정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조차 이 일의 묘미예요.”

엄정화라는 이름이 2015년에도 여전히 현재의 엄정화인 이유다.

“지향점은 결국 외부의 시선이나 상장이 아니라 만족감이에요. 무대든 극이든 제가 얼마만큼의 얘기를 갖고 있는지가 중요해요. 스스로를 설득시킬 수 있을 만한. 나이 들어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어쩔 수 없이 극에 필요한 구성원 중 한 명이어야 한다면, 전 안 할 거예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진 않아요. 스스로 만족감을 얻고 최선을 다할 수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