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에 시달리던 작가 배영환이 드디어 ‘다음 날(tomorrow)’을 맞았다. 그리고 이제 미술의 다음 날을 생각하고 있다.

Numéro, 2009년 4월
에디터│최태형 포토그래퍼│안지훈

정부(government)를 도발하며 자극하는 일은 사회운동이나 테러만이 아니다. 어떻게 도발하고 자극하느냐는 이제 미술의 문제이기도 하다. “미술의 아름다움은 끝났다. 얼마나 감각적인가, 세련되고 미니멀한가를 넘어서 이제 공공 미술의 개념을 잡아가고 있다.” 배영환이 그가 생각한 공공 프로젝트 중 ‘노숙자 수첩’, ‘갓길 프로젝트’에 이어 세 번째로 선보인 <來日(Tomorrow)>전 전시장에서 한 말이다.

이번 ‘플랫폼 2009’는 예술이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에 머무르도록 놔두지 않고 도시인의 실제 생활과 연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자리다. 특히 공공(public), 공간(space), 삶(life)이라는 키워드하에 예술과 도시의 관계를 모색하고, ‘공공’의 개념을 재정의하며, 공공 미술의 개념을 확장하여 관람객과 소통하게 한다. 또 미술이 지역과 장소적 특징을 반영해 예술 활동의 결과로 예술의 새로운 기능성을 탐구하고 제도를 비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플랫폼 2009’가 배영환의 <來日(Tomorrow)>전으로 시작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배영환은 ‘유행가’나 ‘노숙자 수첩’, ‘남자의 길’같은 하위문화적이거나 주류를 조롱하는 듯한 활동을 보여줬고 이제 내일을 위해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로 공공 미술을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꾸준히 부르주아적인 것에 반기를 들어왔다. 이를테면 그의 최근 작 ‘불면증(Insomnia)’(2008)은 소모되고 버려진 것, 주워 모은 것들로 만든 샹들리에다. 호화로움을 대변하는 샹들리에가 쓰레기로 만들어져 물질적인 것에 대한 묘한 조롱을 상징한다. 그의 말대로 버려진 것은 그 자체로 부르주아적인 것에 싸움을 건다. 그리고 사실 그 ‘버려진 것’을 ‘싸움을 거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배영환이다. 그는 계속 다양한 방법으로 ‘싸움’을 걸고 있다.

그는 공공 미술을 일종의 트렌드라고 말했다. 현대미술 자체가 미술의 대안이라는 뜻. 미디어 아트 이후에 나타난 경향이 바로 공공 미술이다. “공공 미술이라는 이름에는 그동안의 미술은 공적이지 못했다는 전제를 담고 있다. 물론 명작은 그 자체로 공적이며 자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작업 과정이 공적인 것을 의도했는지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의 공공 미술은 그 정의를 새로 세우는 과정에 있다. 그보다는 한국 사회 자체가 공공성의 합의를 이루는 게 먼저일 것이다.” 배영환의 공공 미술은 미술과 사회가 유기적으로 만나 소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굳어 있는 정부의 시스템을 꾸준히 자극하는 것이다. 그는 이번 <來日(Tomorrow)>전, 즉 ‘도서관 프로젝트’를 통해 국가와 정부를 겨냥한 미(美)적 도발을 하고 있다. <來日(Tomorrow)>전은 농어촌과 소외 지역의 주민들, 특히 어린이와 노인들을 위해 기획한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미술의 형식을 통해 지역 현장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대안을 제시하며 실천하는 프로그램이다. 전시장에는 어린이와 노인을 위한 도서관의 모델이 하나씩 설치되어 있다. 목재와 골판지로 제작한 컨테이너형 모델에는 실제 사이즈의 도서와 책장, 가구가 놓여 있다. 또 각각 독립된 모듈로 이루어진 컨테이너는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에 맞게 조립할 수 있다. 다양한 컨테이너 모듈의 변형은 이것들이 전시장 안에서뿐만이 아니라 실제 들어설 위치와 공간을 고려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컨테이너 도서관이라는 방식을 택한 이유도 단순하고 명료하다. 컨테이너가 이동을 위한 가장 간단하고 완벽한 구조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컨테인(contain)’이라는 단어의 뜻처럼 담고 나누는 데 가장 적합한 수단이며 ‘참여’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굳이 컨테이너가 아니어도 좋다. 주제를 위해, 즉 그가 말한 공공 미술, ‘의도’ 했느냐의 문제에 따라 표현 방법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마라도 근처의 작은 섬 가파도에는 컨테이너를 운반할 만한 제반 시설이 없다. 그 때문에 가파도에는 버스를 레노베이션해 만든 버스 도서관을 보낼 예정이다. 주목할 것은 컨테이너 자체가 아니라 프로젝트의 주제와 개념을 해치지 않는 유연한 사고다. 공공 미술은 참여하고 활용하며 누리게 해야 빛이 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공 미술은 사회 활동이나 투쟁과 다르다.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을 자극해 움직이게 하고 굳어 있는 정부를 자극하는 것이지 직접 시스템을 깨뜨리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배영환은 이를 ‘예쁜 방식’의 반대라고 했다. 비주얼적으로 ‘예쁜’ 게 아니라 표현 방법이 ‘예쁜’ 것을 말한다. 20년 전의 최루탄, 쇠파이프와 지금의 촛불이 다르듯 말이다. 미술은 굳어 있는 기관과 자본주의를 자극해 그들의 참여를 이끌어낸다. 그래서 배영환의 도서관 프로젝트는 전시가 끝나도 완성된 것이 아닌 진행 중인 프로젝트다. “미술은 보는 사람이 완성한다. 미술도 누군가 보아야 한다.” 배영환은 말한다. ‘본다’는 것은 ‘참여’를 의미하기도 한다. 도서관 프로젝트는 전시 일정과 상관없이 계속 협의되고 논의되어 실제 도시 곳곳에 구현될 예정이다. 한 곳 한 곳 컨테이너 도서관이 자리 잡을 때 비로소 프로젝트는 방점을 찍고 공공 미술은 그 목적을 달성해갈 것이다.

누구는 배영환을 두고 민중미술의 계보를 잇는 작가라고 한다. 엘리트적 예술가에 대한 조롱과 주류 미술가의 정체성에 대한 집요한 환멸을 읽어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평가와 함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주류 미술가가 되었다. 상업적 공간인 PKM 갤러리에서 개최하는 전시를 의식해 그에게 왜 주류로 옮아가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언더그라운드가 그를 밀어냈다고. 한국이라는 울타리는 사실 언더그라운드와 메이저를 구별하는 것 자체가 성립되기 힘든 작은 구조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지적한다. “그런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를 텍스트로 평가하고 묶어둘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품이 ‘젊다’는 점은 굉장히 중요하다. 아티스트가 어떤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가. 나는 그걸 ‘현장성’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지금은 ‘현대성’이 더욱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다음 날’이 현대성이 아닐까 싶다.” 그는 <來日(Tomorrow)>전을 통해 이미 미술과 함께 내일을 살고 있다.

Better tomor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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