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quire Korea, 2014년 11월
Photographs by KONG YOUNGKYU
저는 그 백진희가 아니에요
하얀 피부의 귀여운 얼굴, 코를 찡긋하며 짓는 웃음. 영락없이 백진희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한동안 힘들었어요. 제 스스로가 하찮게 느껴져서요.”
백진희의 입술은 언제든 목젖을 보이며 웃음을 터뜨릴 것처럼 장난기가 넘쳤다. 코를 찡긋거리며 쌍꺼풀 없는 동그란 눈을 반달로 만들 땐, 아무 걱정 없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때론 발랄하게 때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촬영을 마친 그녀가 진지한 목소리로 던진 말은 그래서 의외였다.
백진희와의 인터뷰는 귀여운 동생처럼 까불거리다 농담 같은 얘기를 주고받을 거라 생각했다. 메이크업을 하면서도 대본에서 눈을 떼지 못했지만 한 번씩 스태프들과 장난스런 미소를 주고받았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한동안 힘들었다니, 하찮게 느껴졌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가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을지 짐작이 안 돼서 그렇기도 했다.
그녀는 2008년 독립영화로 데뷔해 이듬해 영화 잡지가 선정한 ‘2009의 신인 여배우’로 뽑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트콤계의 스타 연출자인 김병욱 PD의 부름을 받았다. MBC 시트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하 하이킥)〉은 그녀에게 대중적 인지도와 친근한 이미지, 그리고 인기를 함께 안겨줬다.
물론 스스로 잘하는 것 같아도 와 닿는 무엇인가가 없으면 지칠 수도 있다. 그러나 백진희는 MBC 연예대상에서 코미디 시트콤 부문 인기상을 받으며 대외적인 인정도 받았다. 대체 이렇게 수월하게 데뷔한 배우가 얼마나 있을까?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봤다. 여전히 귀여운 백진희의 눈에선 도대체 굴곡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것도 생각해보셔야 해요. ‘남들이 보기에 걱정 없어 보이는 삶을 살 정도면 그 사람은 얼마나 치열했을까?’ 하는 거요. 저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저도 시청자의 한 사람이고, 또 한 명의 사람으로 부러운 사람들이 있죠. 멋지고 예쁘고 뭐든 잘해내는 사람들이요. 그런데 저는 그냥 겉모습만 보는 거죠. 그 사람은 그걸 이루기 위해, 멋진 모습을 보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왔을 텐데 말이죠.”
“그러니까 스스로 열심히 했다는 거죠? 에이 자기 자랑?”
“저… 진짜 열심히 살았어요.”
장난치며 농담 같은 대화를 하려던 마음이 금세 진지해졌다. 내가 이미지로만 그녀를 넘겨짚고 인터뷰에 임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의 치열하고 힘들었을 노력을 보지 못하고 운이 좋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건 아닐까 미안하기도 했다.
“여러 선배님이 해준 말씀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있어요. 배우는 두 가지 부류가 있대요. 한 부류는 정말로 큰 운, 대운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뭘 하든 다 되는 사람이죠. 나머지 한 부류는 정말 차곡차곡 쌓아가는 사람들이래요. 그러면서 운도 있어야 해요. 그래야 계속해나갈 수 있거든요. 전 후자 쪽인 것 같아요. 누구보다 열심히 했어요. 잠도 줄여가면서….”
그러고 보니 그녀는 꾸준히 다른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이 어울리지 않을 거라 말하는 역할도 그녀는 애써 도전했다.
나 역시 백진희랑은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쉽게 말했던 〈기황후〉가 떠올랐다. 변명하자면 애정 때문이었다. 그녀의 귀여운 얼굴과 〈하이킥〉에서의 발랄한 이미지의 합작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소녀 같은 백진희를 기대하고 있어서다. 발랄한 모습이 내게 즐거움을 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도 알고 있어요. 제 이미지는 여성스럽기보단 소녀 같은 이미지죠. 게다가 마르고 작기도 하고요. 제가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할 때 사람들이 몰입하기 힘들게 하는 요소인 것 같기도 해요. 그렇다고 제가 어깨를 넓히는 수술을 할 수도 없잖아요. 그런 건 노력으로, 연기로 커버할 수밖에 없어요.”
그녀는 〈기황후〉의 타나실리를 연기하며 귀여운 이미지를 버리고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찬 표독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백진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차갑고 냉정했다.
“주변에서 백진희가 저런 얼굴로 악역을 연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열에 아홉이었어요. 그런데 〈기황후〉 이후에 그런 얘기는 없어졌어요. 끝날 때쯤
에는 귀여웠던 사람이 나쁘게 변해가면서 불쌍하게 죽었다며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제가 딱 타나실리 역을 보고 생각한 감정이었어요. 나쁘기만 해서는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결국 제가 생각하고 연기한 게 전달됐어요. 〈기황후〉를 마치고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었어요. 그때 제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한 번 깬 것 같아요.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녀의 노력은 다행히도 인정받고 있다. 차곡차곡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운도 따르고 있는 것 같다. 〈기황후〉를 통해 여자 신인상을 받았으니 말이다.
“한동안 힘들었어요. 제가 하찮게 느껴져서요. 드라마 〈트라이앵글〉을 끝내고 두 달 정도 쉴 때였어요. 연기를 할 때는 모르지만 드라마 밖으로 나온 저는 하고 싶은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사람이더라고요. 세상에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었어요. 열심히 계속 작품을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쉰다는 게 불안했었나 봐요.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아서요.”
그녀의 말을 듣고 그녀의 얼굴을 봤다. 1990년생 앳된 여배우는 여전히 귀여웠다. 그러자 그녀의 말대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밝고 맑은 얼굴을 보이는 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진희가 〈하이킥〉 속 백진희로 보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덜어내는 법을 배웠어요. 해외 봉사 활동이 많은 도움이 됐어요. 얼마 전에 동남아 빈민가 어린이를 도우러 다녀왔거든요. 아이들이 정말 해맑아요. 도우러 갔다가 힐링이 돼서 와요.”
그녀는 지금 MBC 드라마 〈오만과 편견〉에서 검사 한열무 역으로 또 한 번 새로운 ‘노력’을 하고 있다.
“요즘은 촬영장 가는 게 정말 행복해요. 한열무의 과거 트라우마 때문에 불쑥 힘든 감정을 연기해야 하는 게 힘들고, 검사라는 직업상 건조한 연기가 어렵긴 하지만요. 그래도 정말 어딘가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도록 연기하고 싶어요. 〈오만과 편견〉은 겨우 4회 방송이 나간 상태지만 반응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처음엔 백진희랑 검사가 어울릴까 했던 우려의 시선을 고작 4회 만에 바꿨어요.”
그녀는 어른스러웠다. 힘들 테지만 도전하는 것도, 어려움을 털어내는 것도 나보다 낫다 싶었다. 무엇보다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 그랬다.
하찮게 느껴지는 자신이 힘들었다는 말을 듣곤 위로하려던 마음을 바꿨다. 차곡차곡 중심을 잘 잡아가는 것 같아서다. 대신 딴소리를 했다.
“〈하이킥〉의 백진희는 참 까불거렸는데 진지하네요.”
“저 그 백진희 아니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