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변한다. 감정이 아니라 방법이 그렇다. 목숨을 걸었던 사랑이 ‘밀고 당기기’가 되더니 간만 보고 끝나기도 한다. 요즘은 한창 ‘썸’ 타는 시대다.
Esquire Korea
글/최태형 사진/박남규
남녀의 사랑은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해왔다. 사실 원했건 아니건 어찌할 수 없이 그렇게 됐다. “심장은 진즉에 모래주머니가 돼버렸는데 이제 와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던 〈밀회〉 속 김희애의 대사처럼 말이다. 인류를 유지시키는 근본적인 원동력이 사랑이기에 그렇다. 인류는 한 번도 사랑을 멈춘 적이 없다. 그 덕에 우리는 여기에 있다. 이렇듯 사랑은 인종과 문화, 시대와 세대를 넘어 공통되고 보편적인 감정이다. 가장 오랜 감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태도나 관점, 표현의 방법은 제각기 다르다. 수많은 것들이 세상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사이에도 사랑이 굳건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고 한들 어떻게 행동할지는 알 수 없다. 물론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이나 세대의 문제만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요즘 것들…’ 하는 고리타분한 ‘꼰대’가 된다.
시대를 봐야 한다. 세대의 행동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은 시대의 반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새로운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비추어보아야 할 것은 그래서 시대상이다. 사랑에 반영된 시대상을 알아야 연애의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옛날 같았으면 자식 같은 유아인을 향한 마음을 사랑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알아차렸더라도 ‘노망이 났나 봐’ 하며 애써 억눌렀을지 모른다. 보편적인 사랑이라는 감정도 표현은 세대나 시대, 지역별로 달라지기에 무엇이 옳다 그르다 말할 순 없다. 요즘 것들 너무 쉽다고 할 수도 없고, 옛날 사람들 고리타분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시대의 반영을 세대의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
사랑과 연애의 방법은 변해왔다. 한때는 사랑에 목숨을 걸었다. 네가 없으면 죽겠다며 목을 매기도 했고 떠난 사람을 그리며 평생을 걸기도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아름다운 얘기가 아니다.
네이버에서 옛날 신문을 모아놓은 〈뉴스 라이브러리〉를 들춰보다가 〈동아일보〉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흥미롭다기보다 놀라웠다. 1922년 6월 16일 기사다.
제목: 연애 자살도 일풍조
남자 한 명이 목을 매고 소나무 가지에 걸려 ‘욱욱’ 소리를 내고 있으며 그 소나무 아래에는 어떤 어여쁜 여자 한 명이 손과 발을 노끈으로 결박당하고 나무에 달린 남자를 바라보며 어찌할 줄을 몰라 야단을 치므로 산보하던 사람은 매우 놀라 그 둘을 풀어놓았다. (중략) 내용인 즉 목을 맨 김 모라는 자는 최후 수단으로 그 여자를 삼청동으로 데리고 가 내가 네 앞에서 죽는 것을 똑똑히 보아라 하고 전기와 같이 여자의 손발을 노끈으로 결박하고 그는 소나무 가지에 목은 맨 것이더라.
요약하자면 이렇다. 미래를 약속한 여자친구의 변심에 죽겠다며 여자가 보는 앞에서 목을 맨 사건이다. 흥미로운 건 제목이다. 연애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 유행이라는 말이다. 끔찍한 사건보다 이런 일이 흔하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9일 후인 1922년 6월 25일 기사에는 자살자 통계가 실렸다.
제목: 1위 연애
1월 이래 37명 경성 시내 자살 통계– 세상에 누가 죽기를 원하리오. 살기를 원하고 사는 중에도 잘살기를 원함은 모든 사람의 상정이거니와 그러나 자기의 생명을 자기의 손으로 끊고 무참히 세상을 저버리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다. 금년 1월 1일부터 6월 20일까지의 경성 시내 자살자의 통계와 원인을 듣건대 (중략) 그 원인으로 말하면 연애에 관한 사건이 제일 많고 그 다음에는 생활 곤란에 관한 사건이며 그 외에는 기타 여러 가지 사정이더라.
생활 곤란보다 연애가 더 힘들었던 그때가 이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기사만 보자면 그렇다. 게다가 1922년은 일제강점기 시대다. 나라를 빼앗긴 상태에서도 자살하는 이유가 연애 때문이라니…. 나라 잃은 처지를 비관해서도,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서도 아니다. 그러나 사랑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자살했다고 단순히 생각해버리면 안 된다. 그 당시는 일제의 민족 분열 통치 시기였다. 10여 년간의 핍박을 받다가 이제 자신의 물려받은 이름도, 우리의 글도 쓸 수 없게 된 상황이다. 생활고처럼 배가 고픈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삶을 지탱할 수 있게 믿고 의지한 사람이 떠나는 건 배가 고픈 문제보다 더 큰 문제였을 수 있다.
지금은 사회적으로 ‘썸’이 화두다. 썸은 영어 Something에서 비롯한 신조어로, 흔히 우리말 동사 ‘타다’와 합쳐져 요즘은 너도나도 연애의 감정을 ‘썸 탄다’고 표현한다. 애써 해석해보자면 무엇인가 감정이 있는데 마치 줄타기하듯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는다는 게 아닐까 싶다.
올해 상반기 최고의 히트곡으로 꼽히는 소유, 정기고의 노래 썸의 한 구절을 빌리면 조금 수월할 것 같다.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너”
사람마다 썸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그렇지만 명확한 건 확실하게 경계를 나누지 않는다는 것이다. 썸에는 기존의 연애와 다르게 시작점이 없다. 사귀자, 말자의 말이 없다. 그래서 연애 상담 TV 프로그램에는 이게 ‘그린라이트’인지 아닌지를 묻는 질문이 쇄도한다. 그린라이트는 관계의 OK 사인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하다. 불분명한 경계의 관계도 연애의 한 방식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썸 타는 것에는 연인들의 행위가 모두 포함된다. 섹스 역시 그렇다. 섹스를 하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관계를 결정하지 않는다. 섹스도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얼마 전 한 소셜 데이팅 어플리케이션 업체가 연애 고백에 대한 리서치를 진행했다.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고백에 대한 생각을 물었는데, 고백이 필요한 이유로 ‘상대의 마음이 나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연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전체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나머지 10퍼센트에는 ‘적극적인 스킨십, 애정 표현을 위해서’, ‘다른 이성과의 바람을 막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요즘 고백이라는 경계 없이 썸 타는 이유를 유추해볼 수 있다.
썸 타는 이유는 연애에도 상대의 마음보다는 나의 마음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연애한다고 해서 책임을 다할 생각도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책임은 상대방을 책임진다는 게 아니다. 단둘만의 관계를 유지해야 할 책임이다. 다른 누군가와 섹스를 나누는 것도 여러 연애 상대를 만드는 것도 용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썸 타는 세대를 비난할 수도 있다. 사랑에 목숨을 걸던 세대가 ‘밀당’하던 세대를 계산적이라며 욕했던 것과 같다. ‘밀당’하던 세대가 간 보는 세대를 비겁하다 말했던 것과 비슷하다. 누군가는 ‘젊은 것’들을 싸잡아 ‘문란하다’, ‘무책임하다’ 말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시대를 세대의 탓으로 돌려선 안 된다. 새로운 방식의 라이프 스타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를 봐야 한다. 지금 세대는 승자 없는 무한 경쟁의 시대에 놓여 있다. 경쟁에서 승리한다 해도 88만원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 확률이 높은 세대다. 단 한 번의 실수에도 누구든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의 기회비용이 높다. 살아남지 못하면 죽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인데도 그렇다. 이들에게 실패를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사치다. 실패는 더 이상 인자한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2010년 통계청 자료를 보면 사람들이 자살을 생각하는 첫 번째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와 비교한다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썸은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다. 상처입은 사람들의 특징을 세대가 보여주고 있다. 실패가 두려워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사랑의 아름다움마저 간과하게 됐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지금 세대가 이전 세대보다 나은 점은 숨기지 않고 솔직히 드러낸다는 것이다. 썸을 통해 다양한 담론을 만들어내고 함께 이야기하며, 노래하며 고민한다는 것이다.
연애를 연애답게, 아름다운 관계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대의 치유가 필요하다. 감정을 죽이고 누르는 것은 불행일 뿐이다. 살아 있으면서 죽는 것과 같다. 삶의 본능이자 무기인 감정을 살려내야 한다. 세대가 아닌 시대의 책임이자 의무다.
[박스] RING THE BELL!
누군가는 ‘썸’ 타는 세대를 비난할 수도 있다. ‘젊은 것’들을 싸잡아 ‘문란하다’, ‘무책임하다’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대를 세대의 탓으로 돌려선 안 된다. 새로운 방식의 연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를 봐야 한다. 세대를 논하려면 시대의 치유가 먼저다.
제목: 연애 자살도 일풍조
남자 한 명이 목을 매고 소나무 가지에 걸려 ‘욱욱’ 소리를 내고 있으며 그 소나무 아래에는 어떤 어여쁜 여자 한 명이 손과 발을 노끈으로 결박당하고 나무에 달린 남자를 바라보며 어찌할 줄을 몰라 야단을 치므로 산보하던 사람은 매우 놀라 그 둘을 풀어놓았다. (중략) 내용인즉 목을 맨 김 모라는 자는 최후 수단으로 그 여자를 삼청동으로 데리고 가 내가 네 앞에서 죽는 것을 똑똑히 보아라 하고 전기와 같이 여자의 손발을 노끈으로 결박하고 그는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맨 것이더라.
요약하자면 이렇다. 미래를 약속한 여자친구의 변심에 죽겠다며 여자가 보는 앞에서 목을 맨 사건이다. 흥미로운 건 제목이다. 연애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 유행이라는 말이다. 끔찍한 사건보다 이런 일이 흔하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9일 후인 1922년 6월 25일 기사에는 자살자 통계가 실렸다.
제목: 1위 연애
1월 이래 37명 경성 시내 자살 통계– 세상에 누가 죽기를 원하리오. 살기를 원하고 사는 중에도 잘살기를 원함은 모든 사람의 상정이거니와 그러나 자기의 생명을 자기의 손으로 끊고 무참히 세상을 저버리는 사람도 적지 아니하다. 금년 1월 1일부터 6월 20일까지의 경성 시내 자살자의 통계와 원인을 듣건대 (중략) 그 원인으로 말하면 연애에 관한 사건이 제일 많고 그 다음에는 생활 곤란에 관한 사건이며 그 외에는 기타 여러 가지 사정이더라.
생활 곤란보다 연애가 더 힘들었던 그때가 이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기사만 보자면 그렇다. 게다가 1922년은 일제강점기 시대다. 나라를 빼앗긴 상태에서도 자살하는 이유가 연애 때문이라니…. 나라 잃은 처지를 비관해서도,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서도 아니다. 그러나 사랑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자살했다고 단순히 생각해버리면 안 된다. 그 당시는 일제의 민족 분열 통치 시기였다. 10여 년간의 핍박을 받다가 이제 자신의 물려받은 이름도, 우리의 글도 쓸 수 없게 된 상황이다. 생활고처럼 배가 고픈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삶을 지탱할 수 있게 믿고 의지한 사람이 떠나는 건 배가 고픈 문제보다 더 큰 문제였을 수 있다.
지금은 사회적으로 ‘썸’이 화두다. 썸은 영어 Something에서 비롯한 신조어로, 흔히 우리말 동사 ‘타다’와 합쳐져 요즘은 너도나도 연애의 감정을 ‘썸 탄다’고 표현한다. 애써 해석해보자면 무엇인가 감정이 있는데 마치 줄타기하듯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는다는 게 아닐까 싶다.
올해 상반기 최고의 히트곡으로 꼽히는 소유, 정기고의 노래 썸의 한 구절을 빌리면 조금 수월할 것 같다.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너”
사람마다 썸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그렇지만 명확한 건 확실하게 경계를 나누지 않는다는 것이다. 썸에는 기존의 연애와 다르게 시작점이 없다. 사귀자, 말자의 말이 없다. 그래서 연애 상담 TV 프로그램에는 이게 ‘그린라이트’인지 아닌지를 묻는 질문이 쇄도한다. 그린라이트는 관계의 OK 사인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하다. 불분명한 경계의 관계도 연애의 한 방식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썸 타는 것에는 연인들의 행위가 모두 포함된다. 섹스 역시 그렇다. 섹스를 하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관계를 결정하지 않는다. 섹스도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얼마 전 한 소셜 데이팅 어플리케이션 업체가 연애 고백에 대한 리서치를 진행했다.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고백에 대한 생각을 물었는데, 고백이 필요한 이유로 ‘상대의 마음이 나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연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전체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나머지 10퍼센트에는 ‘적극적인 스킨십, 애정 표현을 위해서’, ‘다른 이성과의 바람을 막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요즘 고백이라는 경계 없이 썸 타는 이유를 유추해볼 수 있다.
썸 타는 이유는 연애에도 상대의 마음보다는 나의 마음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연애한다고 해서 책임을 다할 생각도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책임은 상대방을 책임진다는 게 아니다. 단둘만의 관계를 유지해야 할 책임이다. 다른 누군가와 섹스를 나누는 것도 여러 연애 상대를 만드는 것도 용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썸 타는 세대를 비난할 수도 있다. 사랑에 목숨을 걸던 세대가 ‘밀당’하던 세대를 계산적이라며 욕했던 것과 같다. ‘밀당’하던 세대가 간 보는 세대를 비겁하다 말했던 것과 비슷하다. 누군가는 ‘젊은 것’들을 싸잡아 ‘문란하다’, ‘무책임하다’ 말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시대를 세대의 탓으로 돌려선 안 된다. 새로운 방식의 라이프 스타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를 봐야 한다. 지금 세대는 승자 없는 무한 경쟁의 시대에 놓여 있다. 경쟁에서 승리한다 해도 88만원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 확률이 높은 세대다. 단 한 번의 실수에도 누구든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의 기회비용이 높다. 살아남지 못하면 죽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인데도 그렇다. 이들에게 실패를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사치다. 실패는 더 이상 인자한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2010년 통계청 자료를 보면 사람들이 자살을 생각하는 첫 번째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와 비교한다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썸은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다. 상처입은 사람들의 특징을 세대가 보여주고 있다. 실패가 두려워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사랑의 아름다움마저 간과하게 됐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지금 세대가 이전 세대보다 나은 점은 숨기지 않고 솔직히 드러낸다는 것이다. 썸을 통해 다양한 담론을 만들어내고 함께 이야기하며, 노래하며 고민한다는 것이다.
연애를 연애답게, 아름다운 관계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대의 치유가 필요하다. 감정을 죽이고 누르는 것은 불행일 뿐이다. 살아 있으면서 죽는 것과 같다. 삶의 본능이자 무기인 감정을 살려내야 한다. 세대가 아닌 시대의 책임이자 의무다.
[인용 박스] RING THE BELL!
누군가는 ‘썸’ 타는 세대를 비난할 수도 있다. ‘젊은 것’들을 싸잡아 ‘문란하다’, ‘무책임하다’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대를 세대의 탓으로 돌려선 안 된다. 새로운 방식의 연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를 봐야 한다. 세대를 논하려면 시대의 치유가 먼저다.
새로운 시대의 연애
사랑은 변한다. 감정이 아니라 방법이 그렇다. 목숨을 걸었던 사랑이 ‘밀고 당기기’가 되더니 간만 보고 끝나기도 한다. 요즘은 한창 ‘썸’ 타는 시대다.
남녀의 사랑은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해왔다. 사실 원했건 아니건 어찌할 수 없이 그렇게 됐다. “심장은 진즉에 모래주머니가 돼버렸는데 이제 와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던 〈밀회〉 속 김희애의 대사처럼 말이다. 인류를 유지시키는 근본적인 원동력이 사랑이기에 그렇다. 인류는 한 번도 사랑을 멈춘 적이 없다. 그 덕에 우리는 여기에 있다. 이렇듯 사랑은 인종과 문화, 시대와 세대를 넘어 공통되고 보편적인 감정이다. 가장 오랜 감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태도나 관점, 표현의 방법은 제각기 다르다. 수많은 것들이 세상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사이에도 사랑이 굳건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고 한들 어떻게 행동할지는 알 수 없다. 물론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이나 세대의 문제만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요즘 것들…’ 하는 고리타분한 ‘꼰대’가 된다.
시대를 봐야 한다. 세대의 행동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은 시대의 반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새로운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비추어보아야 할 것은 그래서 시대상이다. 사랑에 반영된 시대상을 알아야 연애의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옛날 같았으면 자식 같은 유아인을 향한 마음을 사랑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알아차렸더라도 ‘노망이 났나 봐’ 하며 애써 억눌렀을지 모른다. 보편적인 사랑이라는 감정도 표현은 세대나 시대, 지역별로 달라지기에 무엇이 옳다 그르다 말할 순 없다. 요즘 것들 너무 쉽다고 할 수도 없고, 옛날 사람들 고리타분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시대의 반영을 세대의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
사랑과 연애의 방법은 변해왔다. 한때는 사랑에 목숨을 걸었다. 네가 없으면 죽겠다며 목을 매기도 했고 떠난 사람을 그리며 평생을 걸기도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아름다운 얘기가 아니다.
네이버에서 옛날 신문을 모아놓은 〈뉴스 라이브러리〉를 들춰보다가 〈동아일보〉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흥미롭다기보다 놀라웠다. 1922년 6월 16일 기사다.


